“나는 왜 하는일마다 안될까..” 중학교 졸업 학력으로 사회로 던져저 용역청원경찰 일을 하던 남자에게 찾아온 기적에 모두 가슴이 먹먹해지고 말았습니다

행상을 하다가 운좋게 은행 청원경찰로 취직을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고객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딱딱하다’는 지적을 받고웃는 연습을 하기 시작 했는데요. 많은 연습 끝에 그는 은행 입구에서 밝게 인사하는 모습이 고객들의 시선을 끌게됩니다. 그는 좋은 인상을 주었을 뿐만이 아니라 은행 업무에 서투른 노약자들을 도와주면서 은행 업무를 읽히고 금융상품에 대해 공부하기도 했죠. 고객 노트도 만들어서 고객을 관리하면서 고객의 인상과대화 내용까지도 꼼꼼히 기록해 관리를 했습니다. 그 남자가 취직한 은행은 그로 인해 수신고가 몇백억이 증가했습니다. 그 청원경찰은 70만원을 받는 임시직에 불과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을 했죠. 어느날 그가 정식 직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객들이 알고 회사에 그를 정식 직원으로 채용해 줄 것을 진정서를 작성해 제출하는일이 발생합니다. 결국 은행에서도 그의 실적을 무시할 수 없어서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게되는데요.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을뿐, 은행이 합병되면서 퇴직 권고를 받게 되었고 그것을 안 이웃의 한 금고에서 특별 스카웃을 하여 그를 채용합니다. 그를 채용한 새마을 금고는 80억원에 불과하던 지점 예금은 불과 몇달만에 260억원을 넘기는 성과를 보였는데요. 그가 근무하던 은행 고객이 그가 금고로 자리를 옮긴 것을 알고 예금을 금고로 대거 이동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 일은 아무나가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다만 게을러서 하기 싫을 뿐이지요. 누구나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기 때문에못하는 것뿐이지요.” 그는 결국 300억의 예금 유치실적을 올렸는데요. 그는 바로 ‘새마을 금고’의 신화의 주인공, 한원태 지점장입니다.

“불가능한것은 없어요” 양손이 없는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이가 끊임없는 노력으로 일궈낸 ‘기적’에 모두 응원의 메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미국 교육업체 재너-블로저가 1991년부터 주최하는 ‘재너-블로저 손글씨 대회’가 있습니다. 매년 사회 각계각층의 남녀노소가 모여 손으로 쓴 글씨의 아름다움을 겨루는 대회인데요. 메릴랜드 주의 존 가톨릭 공립학교 3학년인 10살 소녀 ‘세라 하인즐리’가 ‘니컬러스 맥심상’을 수상한 사연입니다. 세라는 태어날 때부터 미국인은 아니었습니다.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6살이 되는 해 미국으로 입양되었는데요. 당시 영어 한마디 못하던 세라였지만, 새로운 세라의 가족들은 세라가 영어 손글씨 대회에서 수상할 정도로 성장할 수 있도록 좋은 교육과 사랑을 전해 줬습니다. 사실 세라는 연필을 쥘 손가락만 없는 게 아니라 양손이 모두 없는 장애인입니다. 그런 세라는 의수도 착용하지 않고 당당하게 손글씨 대회에 출전했는데요. 그리고 뭉툭한 양 손목 사이에 연필을 끼우고 멋지게 글을 썼고 결국 상까지 수상해냈습니다. 사람은 때때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마저도 노력으로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위대한 일을 이루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건 노력한다면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꼭 한번 봐줬으면 좋겠어..” 불의의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 남자, 여자친구에게 이별통보를 한 후 되돌아 온 ‘편지’ 한장에 마음이 먹먹해지고 말았습니다

작년에 비가 많이 오던 어느 여름날이었어요. 교통사고로 인해서 하반신이 마비가 됐습니다. 그전에 저는 잘 나가는 직장, 연봉, 학벌까지. 더이상 부러울 게 없었답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소중한 여자 친구가 있었지요. 아주 아주 예쁜 얼굴에, 그 보다도 더 예쁜 마음씨를 가진 그런 여자였어요. 사고가 났을 당시. 저는 하반신 마비 선고를 받았고. 부모님보다도 더 먼저 보고 싶고, 생각났던 게 여자 친구 였답니다. 내가 앞으로 하반신을 쓸 수 없다는 생각에. 그녀와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에. 너무 슬펐죠. 그녀를 처음 본건 5년 전, 대학교 캠퍼스였어요. 웨이브진 긴 생머리에 예쁜 눈웃음, 그리고 맑고 투명한 피부까지 저의 이상형이였고, 저는 첫눈에 반했어요. 그녀는 우리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1년 반을 쫒아다녔고, 저희는 연인이 되었죠. 제 친구들 모두가 저희 커플을 부러워했고, 그녀가 제 여자 친구라는 게 너무나도 자랑스러웠고, 행복했답니다. 그 당시 저의 나이 26살, 그녀는 21살이었죠. 저보다 5살이나 어린 그녀는 마냥 예뻐 보였고,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한 정말로 최선을 다했고 더 해주지 못해서 항상 미안했었죠. 대학교를 졸업 후, 몇 년이 지나서, 저는 직장에 자리를 잡았고, 그녀는 약국의 약사가 되었어요. 그리고 올해, 결혼을 하자고 했었죠. 하지만, 그런 저에게 사고가 생겼죠. 사고 후, 그녀가 저에게 했던말, “오빠 너무 다행이야. 고마워”라고 그녀가 말했어요.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걸”하고 생각했었죠.. 25살의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짐을 짊어지게 할 수 없으니까요… 하반신 마비, 정말 너무 힘이 들더군요. 미안한 마음에 날 떠나지 못할까봐, 저는 결심했었죠. 제가 그녀를 보내주자고.. 결심 후에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했어요. 얘기를 듣던 그녀는 눈물을 보이며, … Read more

“내 엄마라서 고맙고 사랑합니다..” 도서관 공부를 한다며 매일 도시락 두개를 싸달라고 조르던 아들, 그 사정을 안 엄마의 행동에 그저 눈물만 흘렸습니다

“엄마… 나 오늘부터 도시락 두 개 싸 줘… 한 개로 부족하단 말이야“ 아이가 요즘 부쩍 크려고 그러는지 밥 타령을 하네요. 도시락도 하나 따로 준비해 놓고 반찬도 이것저것 담아 놓고선 바라보고 섰습니다. 도시락 하나 더 싸는 게 이리도 힘들까 싶어서요. 매일 도서관에서 공부를 한다며 늦게 오던 아들이 오늘은 시험을 치고 일찍 집으로 왔습니다. 도시락 가방을 현관에 놓고선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그런데 도시락 하나는 그대로 가져왔네요. 오늘은 배가 덜 고팠나 싶어 방으로 들어가 보니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지석아!  왜 그래?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고개를 들어 제 가슴에 안기더니 그제야 큰 소리로 울어버리는 아들. 그동안 하나 더 싸간 도시락은 아들의 짝궁이 집안 사정으로 도시락을 못 싸 오게 되어 싸다 준 거라는 말을 하며 울먹였습니다. “근데 오늘은 왜 그냥 가져왔니?“ 라고 묻는 말에 ‘친구 엄마가 암 수술을 하는 날이라 어젯밤 병원에서 꼬박 새우느라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는 아들의 말이었습니다. 이제껏 힘든 친구를 위해 학교를 마치고선 같이 병원에 가 병간호를 해줬다는 말도 함께요. “그랬구나. 친구가 아주 힘들었겠구나“ 애써 아들의 등을 토닥거린 후 부엌에 와서 한참을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동안 친구 도시락 싸가랴, 병원에서 간병인 노릇하랴, 이젠 남의 아픔도 헤아릴 줄 아는 아들이 대견스러워 피식 웃음이 나오더군요. 비 오는 저녁, 오늘도 아들은 늦나 봅니다. 아홉 시가 넘었는데 말이죠. 열 시가 다 되어서야 파김치가 되어 들어온 아들은 더 걸어갈 힘이 없는지 현관 앞에 주저앉고 맙니다. “울 아들 오늘도 고생했네…” “엄마.. 수술은 잘되었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어… 근데…“ 말끝을 흐리든 아들의 눈빛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 애절함으로 저를 향해 있었습니다. “친구가 초등학교 다니는 남동생이 둘이나 있대…” “그렇구나” 말을 잇지 못하고 등을 보인 채 너털너털 방으로 들어가는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제 맘엔 아들의 그림자 위로 겹쳐지는 알 수 없는 애잔함이 다가왔습니다. 며칠 후 집에 온 아들이 호들갑을 떨며, “엄마,,,, 친구 집에 웬 아주머니가 찾아와서는김치와 음식들을 한 아름 주고 가셨대.“ “헐… 대박!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나…..” “그렇지 엄마! 야호…. 신난다.“ 저렇게 신난 아들의 모습을 참 오랜만에 보는것 같습니다. 일요일이 두 번 더 지난 한가로운 오후, “엄마,,, 엄마,,, 친구가 그러는데 그 아주머니가 또 나타나셨는데… 이번에는 음식뿐만 아니라 집 안 구석구석 청소까지 다 해 주시고 가셨대… 진짜 대박이지,,, 그렇지 엄마.. 그 아주머니 천사다, 그치?…“ 연신 그 아주머니 칭찬에 침이 말라 가는 아들을 보고선, “너 그러다 그 아주머니를 이 엄마보다 더 좋아하겠다?“ “벌써 그 아주머니 팬이 되었는걸요. 아마 조만간에 엄마보다 더 좋아질 것 같은데요…“ “뭐야? 이놈의 자식이…” 그렇게 아들은 매일매일 특종을 실어 나르는 신문기자처럼 친구네 집 소식을 저에게 전하는 게 일이 되어갔습니다. 노을이 구름에 업혀 가는 해질녘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저의 핸드폰으로 아들이 보낸 문자가 들어왔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엄마의 모습을 방금 보았다고요…“ 친구네 집에서 나오는 저의 모습을 아들이 본 것 같네요. … Read more

“우리 집안은 절대 잊지않을것이네” 상고를 나와 양조장에 경리로 취직해 전쟁통에도 끝까지 양조장을 지킨 한 남자, 호암 이병철 회장이 평생 곁에 두고 우애를 나눴습니다

이야기는 어느 답답하고 고지식한 ‘이씨 아저씨’ 이야기입니다. 이 아저씨는 대구상고를 나와 양조장에서 경리사무를 보던 사람이였습니다. 그의 성품은 단돈 1원 한장이라도 속임없는 계산과 정직으로 일하였기에 절대 사장을 속이거나 장부를 속이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 양조장이 새로운 오너한테 인수되었으나,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 잘한다는 평을 들었기에 새로운 사장님도 양조장 경리일을 계속 보도록 하였으며, 오히려 더 많은 중책을 맡기기 까지 하였습니다. 그 당시 다른 양조장의 경리들은 횡령과 장부 누락등으로 은밀하게 푼돈을 챙기는 것을 관행처럼 여겼던 시절이었지만 이 답답한 이씨 아저씨는 단 한푼도 챙기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런 성품에 사장님은 또 다른 양조장과 과수원등의 모든 경영을 맡기고 본인은 서울에서 무역업을 새롭게 시작합니다. 그리고 무역업으로 양조장 사장님은 큰 성공을 거두어 더 많은 돈을 벌고 있었기에 양조장이나 과수원의 경영에 대해서는 일절 관여하지 안했지만, 그래도 이 답답한 ‘이씨 아저씨’는 추호의 차착이 없었습니다. 너무 정도를 걸었기에 오히려 주위에서는 답답하다라는 핀잔을 들으면서까지 양조장 두곳과 과수원 수익을 조금씩 불려 나갔습니다. 그리곤 얼마후 전쟁이 터져 피난을 미쳐 떠나지 못한 양조장 사장님은 가족들과 같이 혜화동에서 숨어 지내다가 서울이 수복되었으나 업장등이 완전히 폐허가 되었기에 가족들을 데리고 지방에 있는 양조장으로 내려갑니다. 중일 전쟁을거쳐 한국동란을 맞이 하였기에 사장님의 재산은 한푼도 융통이 불가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양조장에 도착하니 보통 사람이라면 대부분 전쟁통에 운영자금을 횡령하여 피난을 핑계로 도망하는 일이 대다수였지만, 답답한 ‘이씨 아저씨’는 그 자리에서 계속 성실하게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양조장 사장님은 이 답답한 ‘이씨 아저씨’한테 양조장과 과수원등의 운영결과를 묻자 그동안 벌어 모아둔 돈 3억원을 바치면서 “군납등으로 영업이 잘 되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양조장 사장님은 울먹이면서 “야 ! 이 친구야 자네가 이렇게 큰 돈 3억원을….” 하고 말하며 자기 자녀들에게 이 답답한 ‘이씨 아저씨’에게 “우리 집안은 항상 이일을 잊지 않고 고마워해야 한다”고 강조 하셨습니다. 그후 3억원을 종자돈으로 다시 전후 무역업과 제조업을 시작해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 ‘삼성’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 답답한 경리 아저씨의 성함은 “이창업 사장님” 이시고, 그 양조장 사장님의 성함은 “호암 이병철 회장님” 이십니다. 그후 이창업 사장님은 삼성의 주요 계열사에 근무 하신후 정년 퇴직하였으며, 호암 이병철 회장님은 이 답답한 이창업 사장님을 항상 곁에 두고 평생 우애를 나눴습니다. 출처: 호암자전 정직과 성실을 그대의 벗으로 삼으라, 아무리 누가 그대와 친하다 하더라도 그대의 몸에서 나온 정직과 성실만큼 그대를 돕지는 못하리라. 남의 믿음을 잃었을 때에 사람은 가장 비참한것이다.

“엄마.. 나 다시는 이런짓안할께..” 이불 속에서 엄마가 꺼낸 통장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뒤 발견한 편지, 안타까운 두 모녀의 사연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말았습니다

유나야 빨리 일어나, 학교가야지 엄마의 외침에 눈을 떴다. 늘 그랬다는 듯 나의 시선은 유리 깨진 낡은 시계를 향해 있었다. 시간을 보고 나는 인상부터 찌푸리고 언성을 높였다. “왜 지금깨워줬어!!! 아우 짜증나!!” – 쾅.. 방문소리가 세게 울려 퍼졌다. 주섬주섬 교복을 입고 나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때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나야, 미안하다. 엄마가 몸이 좀 안 좋아서..” “아씨.. 또 감기야?! 그놈의 감기는 시도때도없이 걸려?!” “..늦게..깨워줘서 미안하구나.. 자.. 여기.. 도시락 가져가렴..” – 타악! “됐어! 나 지각하겠어! 갈께!” 도시락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신경 쓰지 않고 내 갈 길을 갔다 뛰어가면서 살며시 뒤를 돌아보았다 엄마는 말없이 주섬주섬 내팽겨진 도시락을 다시 담고 있었다 창백했다.. 여느때보다 엄마의 얼굴이 창백해보였다 하지만 늘 엄마는 아팠기 때문에 난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종례시간이다 이번 주 토요일 날 수학여행을 간덴다. 가고 싶었다. 가서 친구들과도 재미있게 놀고 싶었다. 가난이란 걸 깨끗이 잊고 오고 싶었고 엄마도 잠시 동안은 잊고 싶었다. 집에 와서 여느 때처럼 누워있는 엄마를 보며 인상이 먼저 찌푸려졌다. “어어…우리 민연이 왔어..?” “엄마! 나 이번 주 토요일 수학여행보내줘!” 다녀왔다는 말도 안하고 보내달라고만 했다. “어..수학..여행이라구..?” “어.” “얼만..데..?” 엄만 돈부터 물어봤다. 우리집안 형편 때문에 가야될지 안 가야될지 고민했었다. “8만원은 든다는데?” “8..8만원씩이나..?” “8만원도 없어?! 우리 생그지야? 그지?!” 이런 가난이 싫었다. 돈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가난이 싫었다.. 엄마도 싫었고, 식구가 엄마와 나 뿐이라는 것도 외로웠다. 엄마는, 잠시 한숨을 쉬더니 이불 속에서 통장을 꺼냈다. “여기..엄마가 한푼 두푼 모은거거든..?여기서 8만원 빼가..” 난생 처음 보는 우리 집의 통장을 보며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는 말도 없이 당장 시내의 은행으로 달려갔다. … Read more

“아들아.. 3만원만 주고가면안될까?..” 80살이 넘은 아버지의 용돈 요청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떠난 아들, 뒤늦게 깨달은 아버의 속마음에 그저 눈물만 흘리고 말았습니다

“얘야, 너 삼 만원만 주고 가거라.” “없어요.” 80살이 넘은 아버지가 회사에 출근하는 아들에게 사정을 했건만 아들은 매정하게 거절을 하였다. 늙은 아버지는 이웃 노인들과 어울리다 얻어만 먹어 온 소주를 한번이라도 갚아주고 싶었다. 설거지를 하다 부자간의 대화와 시아버지의 그늘진 얼굴을 훔쳐본 며느리는 한참 무엇을 생각하더니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한참 만에 버스를 막 타려는 남편을 불려 세워 숨찬 소리로 손을 내밀었다. “여보, 돈 좀 주고가요” “뭐 하게?” “얘들 옷도 사 입히고 여고 동창생 계모임도 있어요.” 안주머니에서 5만원 가량을 꺼내 헤아리며 담배 값이, 차 값이 어쩌니 대포 값이 어쩌니 하는 것을 몽땅 빼앗아 차비만 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아파트 양지바른 벽에 기대 하늘만 바라보는 시아버지께 돈을 몽땅 내밀었다 “아버님, 이 돈으로 드시고 싶은 소주도 잡수시고, 친구들과 대공원에도 가고, 하고 싶은대로 하세요” 연신 눈물이 쏟아지려는 시아버지는 며느리가 고마워서 말을 잊은 채 어떻게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날 저녁에 남편이 퇴근하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왜 얘들 얼굴에 꾸중물이 찌찌하게 이렇게 더럽냐고 말했다. 그 이튿날도 또 그 다음 날도 얘들 꼴이 더러워져가고 있었다. 새까만 손등이며, 며칠 전 까지만 해도 반드레하던 얘들이 거지꼴로 변해갔다 남편은 화를 벌컥 내어 고함을 쳤다. “여편네가 하루 종일 뭐 하길래 얘들 꼴을 저렇게 만들어 놓았어” 남편의 화난 소리를 듣고 있던 아내도 화를 내어 남편에게 소리를 질렸다ㆍ “저 얘들을 곱게 키워봐야 당신이 아버지께 냉정히 돈 삼 만원을 거절했듯이 우리가 늙어서 삼만원 달래도 안줄거 아니예요? 당신은 뭣 때문에 얘들을 깨끗이 키우려고 해요?” 아내에게 기가 질려버린 남편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늙은 아버지의 방문을 열었다. 늙은 아버지는 아들의 무정함을 잊은 채 어서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늙은 아버지는 “회사일이 고되지 않느냐? “환절기가 되었으니 감기에 조심해야 한다.”고 어린애처럼 타이르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더 없는 사랑에 아들은 그만 엎드려 엉엉 울고 말았다. 속담에도 … Read more

“어서 기운차리세요 선생님..” 암수술을 받은 한 노인곁에서 떨어지지않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한 여성, 밤낮 가리지않고 극진히 돌 본 이유가 알려지자 모두 눈물만 흘렸습니다

영국의 은퇴한 의사 키스 톰슨(71)씨는 최근 설암 수술을 받고 회복중이며, 그런 그의 병상을 밤낮으로 지키며 극진히 돌본 여성이 있다. 그 여성은 아프리카 출신 간호사 캐서린 콘테(44)씨. 그녀는 노인에게 은혜를 갚으러 호주에서 왔다. 두 사람 인연은 1993년 시에라리온의 한 병원에서 시작됐는데 당시 톰슨 박사는 의료 자선 단체에 속해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산부인과 병동에서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는 어린 임신부를 보게 됐다. 나흘째 산고를 겪고 있던 어린 임신부는 바로 콘테였다. 불과 18세의 콘테는 목숨을 구할 제왕절개 수술에 필요한 70파운드(약 10만원)를 구하지 못해 죽어가고 있었는데 가난에 찌든 그 나라에선 월급 1년치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톰슨 박사가 그 수술비를 대신 내줘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은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콘테는 다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 행복도 얼마되지 않아 또다시 위기에 처했다. 바로 1995년 내란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진것이다. 그러자 톰슨 박사는 이번엔 인접국 기니로 탈출할 수 있도록 온갖 도움을 줬고 2000년 기니에서 대대적인 난민 단속이 벌어져 다시 위험에 빠지자 이번엔 가나로 이주하도록 이동 수단과 숙소를 마련해주고 교육비까지 보태줬다. 그리고 5년 후인 2005년 콘테 가족은 유엔의 난민 재정착 프로그램에 따라 호주로 이민을 가게 됐고, 같은 해 톰슨 박사는 설암 진단을 받았다. 콘테는 호주에서 간호사가 됐다. 톰슨 박사가 아니었다면 이 세상에 태어나 보지도 못했을 딸 레지나(26)도 얼마 전 간호사 자격증을 땄다. 두 모녀는 톰슨 박사에게서 영감을 받아 간호사 직업에 종사하기로 했다. “베풀어주신 것의 다만 한 조각이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어서… 하지만, 그분의 자리를 채 우지는 못할 것”이라며 “끝없는 빚을 졌다”고도 했다. “해가 갈수록 더 느끼게 돼요. 세상의 다른 면을 보게 해주신 거에요. 제 인생에 그런 분이 계셨다는 걸 영원히 감사하며 살아갈 겁니다.”

내 방에 소중하게 간직하던 우리 엄마의 사진, 아빠는 새엄마를 모셔왔고 어느날 엄마의 사진이 없어졌는데.. 도망치듯 집을 나온 저는 오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열두 살이 되던 이른 봄, 엄마는 나와 오빠를 남기고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당시 중학생인 오빠와 초등학교 5학년인 나를 아빠에게 부탁한다며 눈물짓던 마지막 길… 남겨진 건 엄마에 대한 추억과 사진 한장뿐. 엄마는 사진 속에서 늘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아빠는 그렇게 엄마의 몫까지 채워가며 우리 남매를 길러야만 했다. 그게 힘겨워서였을까? 중학생이 되던 해 여름. 아빠는 새엄마를 집으로 데려왔다. 엄마라고 부르라는 아빠의 말씀을 우리 남매는 따르지 않았다. 결국 생전처음 겪어보는 아빠의 매 타작이 시작되었고, 오빠는 어색하게 “엄마”라고 겨우 목소리를 냈지만, 난 끝까지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니 부를 수 없었다. 왠지 엄마라고 부르는 순간 돌아가신 진짜 엄마는 영영 우리들 곁을 떠나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종아리가 회초리 자국으로 피 멍이 들수록 난 입을 앙다물었다. 새엄마의 말림으로 인해 매 타작은 끝이 났지만, 가슴엔 어느새 새엄마에 대한 적개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새엄마를 더 미워하게 되는 결정적인 일이 벌어졌다. 내방에 있던 엄마 사진을 아빠가 버린다고 가져가 버린 것이다. 엄마 사진 때문에 내가 새엄마를 더 받아들이지 않는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때부터 새엄마에 대한 나의 반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새엄마는 분명 착하신 분이었다. 그러나 한 번 타오르기 시작한 적개심은 그 착함마저도 위선으로 보일 만큼 강렬했다. 난 언제나 새엄마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그 해 가을 소풍날이었다. 학교근처 계곡으로 소풍을 갔지만, 도시락을 싸가지 않았다. 소풍이라고 집안 식구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이 되고 모두들 점심을 먹을 때, 계곡 아래쪽을 서성이이고 있는 내 눈에 저만치 새엄마가 들어왔다. 손에는 김밥도시락이 들려있었다. 뒤늦게 이웃집 정미 엄마한테서 소풍이라고 전해 듣고 도시락을 싸오신 모양이었다. 난 도시락을 건네받아 새엄마가 보는 앞에서 계곡물에 쏟아버렸다. 뒤돌아 뛰어가다 돌아보니 새엄마는 손수건을 눈 아래 갖다 대고 있었다. 얼핏 눈에는 물기가 반짝였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증오와 미움 속에 중학시절을 보내고 3학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고입 진학상담을 해야 했다. 아빠와 새엄마는 담임선생님 말씀대로 가까운 인근의 인문고 진학을 원하셨지만, 난 산업체 학교를 고집하였다. 새엄마가 원하는 대로 하기 싫었고, 하루라도 빨리 집을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집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결국, 내 고집대로 산업체 학교에 원서를 냈고 12월이 끝나갈 무렵 경기도에 있는 그 산업체로 취업을 나가기로 결정됐다. 드디어 그날이 오고, 가방을 꾸리는데 새엄마가 울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정말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경기도에 도착해서도 보름이 넘도록 집에 연락 한번 하지 않았다. 산업체 공장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낯섦이 조금씩 익숙해져 갈 무렵 옷 가방을 정리하는데 트렁크 가방 맨 아래 검은 비닐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누군가 가방 속에 넣어놓은 비닐봉투. 봉투 속에는 양말과 속옷 두벌 그리고 핑크빛 내복 한 벌이 들어있었다. 편지도 있었다. 가지런한 글씨체… 새엄마였다. 두 번을 접은 편지지 안에는 놀랍게도 아빠가 가져간 엄마사진이 들어있었다. 새엄마는 아빠 몰래 엄마사진을 간직했다가 편지지속에 넣어서 내게 준 것이다. 이제껏 독하게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며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 동안 쌓였던 감정의 앙금이 눈물에 씻겨 내렸다.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 처음으로 그날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첫 월급을 타고 일요일이 되자 난 홍천행 버스를 탔다. 밤새 눈이 많이 내려 들판에 쌓여있었다. 아빠, 엄마 그리고 새엄마의 내복. 새엄마 아니 엄마는 동구밖에 나와 날 기다리고 계셨다. 빗자루가 손에 들린 엄마 뒤에는 훤하게 아주 훤하게 쓸린 눈길이 있었다. “새엄마.. 그 동안 속 많이 상하셨죠? 이제부턴 이 내복처럼 따뜻하게 엄마로 모실게요.” 아직도 말로 못하고 속말만 웅얼거리는 나를, 어느새 엄마의 따뜻한 두 팔이 감싸 안고 있었다.

“3년뒤 우리 다시 만나면 꼭 결혼하자.. ” 어느날 면회 온 여자친구의 이민 소식, 수수께끼같은 말만 남기고 사라진 그녀의 사연에 그저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제대를 불과 몇 달 앞두었을 때였다. 어느 날 면회를 온 그녀는 한참동안 망설이더니 갑자기 해외로 떠난다고 했다. 그것도 일주일 후에.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무슨 얘기야, 대체?” “가족이 모두 이민가. 나도 따라갈 거야.” “가지마. 나를 두고 어떻게…” “가야해.” “안 돼! 부탁이야!” “여기 있으면 뭐 할 건데. 전부 이민 가는데 나 혼자 남을 순 없잖아.” “…..” 그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랑 결혼해, 나랑 같이 살아.’ 하지만 나는 차마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직 제대가 몇 달이나 남아있었고, 대학을 2년 반을 더 다녀야 했다. 그 후 취직이 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전산과이기는 해도 기업체에게 별로 인기가 없는 지방캠퍼스인데다가 1학년 때 성적은 바닥권 이였다. 영어 실력도 빵점이였다. 그것을 보충할 다른 뾰족한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도 말이 없었다. 이렇게 이별하는 건가? 안되는데… 안되는데……… 나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연락처라도 남겨줘. 제대하면 날마다 전화할게.” “………………아냐, 안 해도 돼” “왜? 왜 안 된다는 거야? 그럼 편지는? 주소라도 가르쳐줘.” “편지는 하지 마.” “헤어지자는 거구나. 내가 싫어졌니? 다른 남자친구 생긴 거야?” “그건 아냐.” 그녀는 말을 딱 잘랐다. 슬픈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유난히 핏기가 없었다. 고민을 많이 했는지 몸도 무척 야위어 있었다. 약간의 정적이 흘렀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다른 남자 생긴 거, 절대 아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종화, 너 밖에 없어. 하지만 자세한 것은 묻지 말아줘. 부탁이야.” “그런데, 왜 전화조차 안 된다는 거야?” 나의 목소리는 다시 높아졌다. 그녀는 힘없이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순간 그녀의 머리칼이 꽂힌 자그만 꽃머리핀이 눈에 들어왔다. …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