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미워 왜그러는거야” 배불리 먹어보는게 소원이였던 사남매 중 막내였던 저는 매일 반공기를 남기는 엄마가 이해안됐고 배가 너무 고픈 어느날 엄마의 밥에 손을..

어부로 살던 아버지는 바다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홀로 열두 살, 열 살, 아홉 살, 여덟 살의 어린 저희 사남매를 키우셨습니다. 작고 가느다란 몸으로 생선으로 가득 찬 바구니를 머리에 얹고, 이곳 저곳 생선을 팔며 생활하셨습니다. 하루 종일 생선을 파는 일로 손님들을 맞이한뒤 집으로 오는길에 사오는 쌀 한 봉지와 생선 한마리.. 어머니의 발걸음은 가벼웠습니다. 오늘은 굶지 않아도 되니까… 어린 저희 사남매의 소원은 배불리 밥 한번 먹어보는 것이었지만 항상 밥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보면 서둘러서 더 먹으려고 다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머니는 항상 식사 때마다 반 그릇의 밥을 남기셨지만 남은 밥은 결코 자식들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밥을 먹으려고 숟가락을 들면 어머니는 급하게 밥그릇을 치우셨죠. 그러던 어느날 막내였던 저는 배가 너무 고팠기에 어머니의 반 남은 밥그릇에 숟가락을 재빠르게 올렸는대요.. 갑자기 밥상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그릇이 우루루 떨어졌습니다.. 우리 사남매는 그 순간.. 하얀 무 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너무 놀라서 서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그때의 모습들과 어머니의 놀라운 표정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네요. 어머니는 항상 쌀이 부족해서 자식들이 배고파하는 것을 보고 우리에겐 밥을 주고 어머니는 자신의 밥그릇의 반을 무로 가득 채워서 반만 드셨기에 남은 밥을 저희에게 주지 못하셨던것이였습니다..

“오래된 일기장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가족끼리 놀러간 계곡에서 발을 헛딛어 물에 빠진 절 구해준 우리 아빠 그런데..

저희 아빠는 언제나 다정하신 분이었습니다. 항상 엄마와 자식이 먼저였던 우리 집안의 든든한 가장이었죠. 그래서 우리 집이 가난해도 참 행복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새 옷을 입었던 기억이 거의 없었어요. 삼 남매 중 둘째라 항상 언니 옷을 물려받았었는데 내 동생은 내 옷을 또 물려 입었고 여기저기 색이 바래고 구멍이 난 옷을 입고 다니던 동생이 항상 안쓰러웠습니다. 가끔 아빠가 추석이나 설에 새 옷을 사주실 때는 너무 행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새 옷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 좋아서 빨래도 안 하고 며칠씩 입은 적도 있었죠. 나중에 커서 알게 된 건데 아빠가 얼마 안 되는 아빠 용돈을 몇 달 동안 모으고 모아서 우리 옷을 사주셧던 거였더라고요. 아빠가 용돈 아끼려고 출퇴근을 걸어 다니셨는데 1시간이 넘는 거리를 매일같이 걸어 다니셨으니 얼마나 피곤하셨을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아빠가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그날은 아빠가 오랜만에 쉬는 날이어서 가족 전부 가까운 계곡으로 놀러 가기로 했어요. 아빠는 놀러 간다고 들뜬 우리가 너무 귀여웠는지 우리 삼 남내를 마트에 데려가서는 과자랑 사탕이랑 음료수를 사주셨습니다. 과자가 잔뜩 들어있는 검은 봉지 들고 계곡으로 향하는데 어찌나 신이 나는지 콧노래를 부르면서 걸었죠. 수영복도 없어서 옆집 친구네서 빌려 입고 튜브도 없어서 그냥 맨몸으로 계곡에 들어가서 한참을 놀다가 엄마가 정성스럽게 만든 도시락도 다 같이 나눠먹었는데 그땐 진짜 행복했었습니다. 너무 행복하니까 매일 이렇게 행복한 일만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죠. 밥 먹고 나니까 언니랑 동생은 졸린지 잠이 들었고 나는 물에 또 들어가고 싶어서 혼자 계곡 물속에 들어가서 놀고 있었습니다. 전 이 순간을 너무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한참을 놀다 보니 어느 순간 너무 깊은 곳에 들어가 버렸고 생각보다 너무 깊어서 발에 아무것도 안 닿지 않아 허우적거렸습니다.. 순간 너무 겁이 나서 눈앞이 까맣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죠. 아무 생각도 안 나고 물은 계속 먹고 살려달라고 울면서 ‘나 이대로 죽는 건가?’라는 생각까지 들던 찰나, 그 순간 누군가 날 구하러 물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제가 물에 빠진 곳이 너무 깊은 곳이라 그런지 날 구출하는게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전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습니다. 눈 뜨자마자 엄마가 보였는데 얼마나 우셨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더라고요. 내가 깨어난 걸 보시더니 또 펑펑 우시는데.. 그때 ‘아.. 나 살았구나..’ 싶었어요. 내가 깨어났단 소식을 듣고 언니랑 동생도 날 보러 왔는데 아빠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엄마한테 아빠 어디 계시냐고 물었더니 병실에서 회복 중이시라고.. 몸 추스르면 절 보러 오실 거라고 하시는데 그때 엄마의 눈빛은 이상하게 떨렸습니다. … Read more

“약속했으니까요..” 하루 2시간만 자며 3억 빚을 갚아나간 남자의 사연이 최근 상황에서 재조명되어 많은이들의 마음을 먹먹하게만들고있습니다

한때 주변에서 잘나간다는 소리를 들으며 시계방을 운영하던 이종룡씨는 장사가 잘 되는 날에는 순수익으로 하루 100만원 이상을 벌기도 했는대요. 이제 살만하다고 느낄 순간도 없이 1997년 IMF 위기가 대한민국에 찾아왔습니다. 잘나가던 사업은 순식간에 망하고, 마침내 3억 5천만원이라는 큰 빚만이 남았는대요. 이종룡씨는 채권자들에게 어떻게든 빚을 갚겠다고 약속한 후 하루 2시간을 채 자지못하는 극한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새벽 신문배달과 아침엔 떡배달 그리고 오후에는 학원운전까지 했으며 도중도중 남는시간엔 폐지를 줍기도하고 신문 판촉까지 했는대요. 전주에서 군산까지 떡을 배달하고 밤 9시경 그는 목욕탕으로 향합니다. 보일러실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바로 목욕탕 청소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쉴틈없이 다시 신문을 배달하며 하루를 시작하는대요. 이렇게 생활해서 버는 돈은 한달에 약 450만원. 생활비를 제외한 대부분의 돈은 빚을 갚는데 … Read more

“나는 어둠속에서 다시 밝아질것이다”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소아마비의 청년이 서울대에 합격한 사연과 근황이 전해져 많은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실밥이 뜯어진 운동화, 지퍼가 고장 난 검은가방, 그리고 색 바랜 옷.. 내가 가진 것 중에 해지고 낡아도 창피하지 않은 것은 오직 책과 영어사전뿐이었습니다.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학원  수강료를 내지 못했던 저는 칠판을 지우고 물걸레질을 하는 등 허드렛일을 하며 강의를 들었어야 했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지우개를 들고 이 교실 저 교실 바쁘게 옮겨 다녀야 했고, 수업이 시작되면 머리가 하얗게 분필 가루를 뒤집어쓴 채 맨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엄마를 닮아 숫기가 없던 나는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는 소아마비입니다. 하지만 전 결코 움츠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 가슴속에선 앞날에 대한 희망이 고등어 등짝처럼 싱싱하게 살아 움직였죠. 짧은 오른쪽 다리 때문에 뒤뚱뒤뚱 걸어 다니며, 가을에 입던 홑 잠바를 한겨울까지 입어야 하는 가난 속에서도 저는 이를 악물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추운 겨울날, 책 살 돈이 필요했던 저는 엄마가 생선을 팔고 있는 시장에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몇 걸음 뒤에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차마 더 이상 엄마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눈물을 참으며 그냥 돌아서야 했습니다. 엄마는 낡은 목도리를 머리까지 침침 감고, 질척이는 시장 바닥 좌판에 앉아 김치 하나로 차가운 도시락을 먹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날 밤 나는 졸음을 깨려고 몇 번이고 머리를 책상에 부딪혀 가며 밤새워 공부했습니다. 가엷은 나의 엄마를 위해서.. 제가 어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는 형과 나, 두 아들을 힘겹게 키우셨습니다. 형은 불행히도 나와 같은 장애인이었습니다. 형은 중증 뇌성마비인 심한 언어장애 때문에 말 한마디를 하려면 얼굴 전체가 뒤틀려 무서운 느낌마저 들 정도이죠. 그러나 형은 엄마가 잘 아는 과일 도매상에서 리어카로 과일, 상자를 나르며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왔습니다. 그런 형을 생각하며 나는 더욱 이를 악물고 공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뒤 시간이 흘러 바라던 서울대에 합격하던 날, 나는 … Read more

와이프를 떠나 보낸 친구의 장례식장, 조문객을 맞이할때도 가슴에 꼭 안고있는 운동화에 전 궁금증을 참지못했고.. 그대로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어제 장례식장에 갔었습니다. 친한 녀석의 친한 녀석… 즉, 저하고는 중학교 동창이지만 학창 시절 안면만 있을뿐, 왕래가 없어서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그런 친구의 아내의 장례식이었습니다. 결혼한 지 1년, 한창 좋은 신혼일 텐데 미래를 꿈꾸며 행복해야만 할 것 같은 이들에게 너무나도 무서운 불행이고 너무도 잔인한 운명이 찾아온것이죠. 장례식을 향하며 같이 가던 친구 녀석에게 들어보니 정말 사이좋은 부부였는데 그래서 너무 안타깝다고 하더라고요. 지하 장례식장으로 내려가니 너무도 한산하더군요.. 사람이 없었습니다. 조문객도 없고 조의금도 다른 친구 녀석이 받고있었죠. 저하고는 친하지도 않았던 친구의 장례식장..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다지 감정의 동요가 올 정도로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씁쓸한 장소에 그 씁쓸한 분위기.. 그리고 얼마나 울었는지 일어설 기력조차 없는 것 같은 얼굴을 보니 기억나는 친구 녀석의 모습에 동요가 되더군요. 처음 뵙지만 이제 뵐 수 없는 너무나도 해맑게 웃고 계신 영정 사진의 제수씨에게 절을 올리고 상주인 친구 녀석과 맞절을 하고..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그냥 손만 잡았습니다.. 친구하고 저는 입술이 시퍼렇게 질린게 잠도 안자고 자리를 지킨것 같은 녀석이 안쓰러워 그 녀석을 끌다시피 데리고 조문객 장소로 나왔습니다. 밥을 앞에  차려두고 얼른 한수저라도 뜨라고 협박하듯 재촉했지요.. 그런데.. 계속 눈에 띄는 것이 친구 녀석이 울면서도 맞절을 하면서도 손에 놓지 않은 낡은 운동화, 주름이 져있지만 깨끗이 빨아진 나이키 농구화같은 운동화를 이 녀석은 한 팔로 품에 안다시피 들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떤 저는 친구 녀석에게 물었습니다. “운동화는 왜 그렇게 들고 있는 거냐? 잠깐 내려놓고 밥부터 먹자…” 달래듯이 말을 해도 이 녀석은 더욱 끌어안듯이 감싸 쥐고 고개만 저었습니다. 사연이 있는 거구나.. 대충 짐작이 가더라고요. 같이 왔던 친구 녀석과 밖에 나와 담배한대를 피웠습니다. 터져 나오는 한숨이 연기와 섞여 조금은 희석이 되더군요.. 제가 담배를 끊지 못하는 또 한가지 이유겠지요.. “그 운동화 뭔지 아냐?” 전 친구 녀석에게 물어봤습니다. 옛날부터 애지중지하는 운동화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자세한 사연은 모르지만 굉장히 아꼈었다고요… 다시 장례식장으로 들어가 간단한 음식에 소주병을 따라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 Read more

“우리 몇시에 볼까요?” 돌아가신 시어머님의 유품인 핸드폰을 보관 중 갑자기 울리는 ‘문자 소리’와 ‘내용’에 흠칫하며 놀랐고 잠시 후 알게된 사실에 오열하고 말았습니다

제게는 핸드폰 2대가 있습니다. 한 대는 제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나라에 계신 시어머님것이죠. 제가 시부모님께 핸드폰을 사드린 건 2년전인대요. 두 분의 결혼기념일에 커플로 핸드폰을 사드렸습니다. 시부모님께 문자 기능을 알려 드리자 두 분은 며칠 동안 끙끙대시더니 서로 문자도 나누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올 작년 3월 시어머님이 갑자기 암으로 돌아가셔서 유품 가운데 핸드폰을 제가 보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달 정도 지날 무렵, 아버님이 아파트 경비 일을 보러 나가신 후 ‘띠링’하며 어머님 핸드폰으로 문자메시지가 울렸습니다. “여보.. 오늘 야간조니까 저녁 어멈이랑 맛있게 드시구려..” 순간 저는 너무 놀랐습니다. 혹시 어머니가 돌아가신 충격으로 시아버님이 치매증상이 온 게 아닐까하는 불길함이 몰려왔습니다. 그날 밤, 또 문자가 날아왔습니다.  “여보.. 날 추운데 이불 덮고 잘 자구려.. 사랑하오” 남편과 나는 그 문자를 보며 눈물을 흘렸고, 남편은 좀 더 지켜보자고 했습니다. 아버님은 그 후.. “여보.. 비 오는데 우산 가지고 마중 가려하는데 몇 시에 갈까요? 아니지.. 내가 미친 것 같소.. 보고 싶네..” 이 문자를 끝으로 시아버님은 한동안 메시지를 보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제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습니다.  “어미야.. 오늘 월급날인데 필요한 거 있니? 있으면 문자 보내거라” 전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네~아버님. 동태 2마리만 사오세요”라고 보냈습니다. 그날 저녁, 우리 식구는 아버님이 사오신 동태로 매운탕을 끓이고 소주 한잔과 함께 아버님이 하시는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습니다. “아직도 네 시어미가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다.. 그냥 네 어머니랑 했던 대로 문자를 보낸 거란다.. 그런데 답장이 안 오더라 그제야 네 어머니가 돌아가신게 실감났다..” “모두들 내가 이상해진 것 같아 내 눈치 보며 아무 말 못 하고 있었던 것도 안다.. 미안하다..” 그렇게 아버님은 하염없이 한참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날 이후, 아버님은 어머님 핸드폰으로 다시 문자를 보내지 않으시지만 요즘은 제게 따뜻한 문자를 보내시곤 하십니다.

“녀석이 무사하면 됐어요” 사람들이 무서워 차량의 엔진룸으로 숨어들어간 길냥이, 잠시 뒤 결정을 내린 차량의 주인의 행보에 모두 박수를 보냈습니다

한 남성이 엔진룸 안으로 떨어진 길고양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벤츠 차량을 해체한 사연이 들려와 훈훈함을 주고 있습니다. 이 남성은 고양이를 구조하기 위해 자신의 차량을 해체하는 결정을 내렸으며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말했는대요. 이어 “고양이가 무사히 구조되어서 다행이다”라고 덤덤하게 말했습니다. 대만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익명의 남성은 운전 중에 나무 밑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목격하는대요. 자세히 보니 나무 위에 있는 고양이를 구조하는 현장이었고 고양이는 겁에 질려서 온몸을 떨며 나무 위에서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남성 또한 고양이를 구하기 위해 차에서 내려 나무 위로 손을 뻗었는대요. 이때 겁을 먹은 고양이는 중심을 잃고 강가로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남성은 지체없이 강으로 뛰어들어가 고양이를 구조했는대요. 여전히 고양이는 겁에 질려 떨고 있었고 고양이에게 압박이 가해질까봐 잠시 잡은 힘을 푼 사이, 그대로 남성의 … Read more

매달 적자보는 남편가게, 내 월급 때려박아 키워놨더니 상의없이 시댁에 안마의자를 보낸 남편. 얼마 후 시어머니에게 말씀드렸고..

명절 연휴를 얼마 앞두고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시어머니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네, 어머니” “잠깐 통화 가능하니?” “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걱정할 일 아니고, 조금 전에 안마의자가 왔는데 너희들 살기도 빠듯할 텐데 뭐하러 이런걸 두대나 사서 보냈어? 돈도 꽤나 들었을텐데, 정말 고맙고 잘쓰마” 시어머니께서 엄청 들뜬 목소리로 말씀을 하시는데 저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대충 감을 잡고서는, “아니에요 어머님, 애들 봐주시는 것만 해도 얼마나 힘드시데요. 항상 마음으로만 감사하다하고 뭐 제대로 해 드린게 없어서 피로라도 풀어시라고 보냈어요” “손주들 보는 거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고맙긴 뭐가 고마워, 일하는 중 일텐데 얼른 일해라, 하여튼 고맙구나” “네 어머니, 퇴근하고 바로 갈께요”라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명절 선물로 남편이 상의도 없이 보냈다는 것에 제 속마음은 허탈하기만 했었죠. 여기서 잠깐 저희 부부를 소개하자면, 저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고 남편은 조그마하게 사업을 하고 있었는대요. 사업이라는게 생각대로 일이 되는게 아니다 보니 생각지도 않은 비용이 들어 갈때마다 월급이 적지 않았던 제 돈으로 버티고 있었죠. 다행히 시간이 흐를 수록 남편의 사업은 자리를 잡아갔는대요. 하지만 그와 더불어 남편이 변하는 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꽤나 일정한 수입이 들어보다보니 그때부터 제가 회사에서 받는 월급을 푼 돈으로 생각하는거예요. “이래서 사람은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니까 안그래? 그 월급 평생 모아봤자 푼돈밖에는 안돼. 그 돈으론 떵떵거리며 살지도 못해, 그니까 나한테 감사하게 생각하란 말이야”라며 남편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며 거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부부는 맞벌이였기에 육아 분담을 하고 있었는데 사업이 잘 되고 바쁘기 시작하면서 육아도 나 몰라라 하는 거예요. 회사에서 갑작스럽게 야근하게 되면 남편에게 애들을 데리고 오라고 부탁하면 “나도 바쁘다”고 거절을 하곤 했죠. 그러면서 “그 도움도 안되는 월급받아 뭐할려고 내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애들이나 잘 키워. 사람 피곤하게 하지말고”라고 말하는대요. 저는 “말이 너무 심한것 아냐? 그나마 내가 직장이라도 다녔으니까 당신에게 도움을 주고 이렇게까지 성장하고 성공할 수 있었잖아. 갈수록 말이 너무 심한것 같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남편은 “또 그 얘기, 누가 알면 몇십억 몇백억 도와준 줄 알겠다. 쥐꼬리만큼 보태줘 놓고선 생색은. 나 지금 그 돈 당신한테 갚고도 남은것 같은데 그말 이제 그만해. 그리고 회사 그만 두라고 하는 것도 애들때문이잖아. 회사 당장 때려쳐”라고 언성을 높혔죠. 남편이 짜증과 거만은 하늘을 찌르고, 저는 홧병이 날 지경이었지만 시부모님께 표현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너무나 좋은 분들이기에 말을 할 수가 … Read more

“의사선생님이 이렇게까지..” 폐암 말기로 목에 가래가 끓는 아버지에게 빨대를 꽂고 가래를 입으로 빼낸 의사선생님, 얼마 후 알게된 정체에 눈물만 흘렸습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셨다. 평생 교감이나 교장자리도 마다하고 아이들 앞에서 교편을 잡으셨다. 하루 종일 재잘대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아버지에게는 더 없는 행복이었다. 정년퇴임을 하신 후, 아버지는 학생들이 그리운지 저녁이면 앨범을 펼쳐 들고 30년 전 처음 만났던 학생들 얘기부터 그리운 옛 이야기를 들려 주시곤 했다. “이 아이는 정말 말썽꾸러기였지…  하루라도 안 싸울 날이 없었단다. 그래도 심성은 착하고 붙임성도 좋아서 나만 보면 떡볶이 사달라며 날마다 조르곤 했지….” “유진이는 참 의젓하고 밝은 아이였다. 아프신 홀어머니와 힘들게 살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았지. 아프신 어머니 때문에 늘 의사가 되겠다고 말하곤 했었단다. 내가 가끔 집에 찾아가서 유진이 몰래 고기며 쌀이며 사다 놓곤 했었는데…” 줄줄이 이어지는 추억담은 늘 우리 자식들 마음을 촉촉이 적시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산책을 다녀오시던 아버지가 쓰러지셨고 그제어야 페암 말기라는것을 알았다. “한 평생 칠판에다 쓰고 닦고 하시더니 폐암이 되셨구나.” 희망이 없다는 의사들의 말을 뒤고 하고 우리는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와 할 수 있는 치료를 계속했다. 종종 아버지 제자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오곤 했다.  그럼 아버진 또 한참을 옛 추억에 잠겨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만큼은 아버지 얼굴에도 생기가 돌았다. 그러나 아버지 병세는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기침 때문에 잠을 못 이루시는 날들이 잦아지고, 가래 끓는 소리도 거칠어졌다. 마침내 대화를 나누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나빠졌다. 그때 마침, 진료 받던 병원에서 의사 한 명을 보내주었다. 20대 후반의 여의사였는데, 가래가 끌면 젖은 거즈로 손가락을 넣어 가래를 꺼내주곤 하면서 가족 만큼이나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었다. 여의사가 오는 날이면 아버지도 유난히 표정이 밝아졌다. 한번은 아버지가 기침이 무척이나 심해져 얼굴은 핏발로 벌게지셨다. 더구나 목은 가래가 들끓어 숨쉬기조차 답답해 하시자, 손으로 가래를 꺼내던 의사는 난데없이 음료수 빨대를 가져오라고 했다. 대체 빨대로 무엇을 하려나하고 의아해하며 가져다주자 그녀는 빨대 한 끝을 아버지 목구멍에 넣고 한 끝은 자기가 물고 가래를 입으로 빨아내는 것이 아닌가. 자식들도 감히 못하는 일을 젊은 여의사가 하고 있었다. 폐암 환자였기 때문에 가래에서 악취가 심했다. 그러나 여의사는 개의치 않는것 같았다. 그렇게 빨아내기를 몇 십분 정도 하자 가래 끓는 소리가 잠잠해지고 아버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몇 달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 Read more

“짐덩어리잖아 짐..” 안타까운 사고로 두팔을 잃고만 할아버지가 집으로 돌아가지않고 목재소에 살아가는 이유가 밝혀지자 모두 오열하고 말았다

82세의 이윤우 할아버지는 팔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을 훌륭하게 해내시는대요. 목재소에서 무거운 목재들을 다루며 힘들게 일하면서도 항상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고 계십니다. 할아버지는 안타깝게 전기 감전사고로 양팔을 잃었지만 목재소의 만능 공장장으로서 홀로 모든 작업을 처리하고 계시는대요. 일이 끝나고 잠시 휴식할 때 할아버지는 취재를 나온 제작진에게 박카스를 따주시려고합니다. 할아버지가 가위로 뚜껑을 따려는 모습에 제작진은 걱정하여 다칠까 노심초사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무렇지않게 뚜껑을 열어서 건네주는대요. 오늘은 할아버지가 평소에 잘 착용하지 않는 의수를 착용하고 은행을 가는날이였습니다. 목재소 밖으로 나가야 하는 날이며 모든게 어색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길을 나섭니다. “이런 곳에 오는 것을 정말 싫어해요. 불편하니까.. 이런 곳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해요”라고 말하는 할아버지. 목재소 밖으로 나가면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오기 때문에 괜히 미안하고 불편해진다고 하는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미소를 잃지 않습니다. 아파트에서 살기 싫어하고 목재소에서 생활하시는 할아버지는 자식들이 함께 지내자고 말도 했지만 거절한채 홀로 지내고 계시는대요. 자신때문에 자식들이 대학을 포기한것에 대한 미안함이 마음 속 깊숙히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자식들에게 불편을 끼치고 싶지 않아 자식들이 있는 따뜻한 아파트에 들어가지 않고 목재소에서 살아가고 계신거였는대요. 자식들의 희생에 마음이 아픈 할아버지는 남에게 누군가의 짐이 되는 것을 싫어하며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홀로 생활하는 할아버지에게도 보고 싶은 사람이 가장 있습니다. 바로 아내인대요. 할아버지가 사고가 있고나서 2년동안 팔다리가 되어줬다고 합니다. 이젠 아내와 사별했다는 할아버지는 “누구보다도 고생한 아내에게 고맙다는 표현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며 얼굴에 슬픔이 가득했습니다. “아직도 많이 생각나, 근데 꿈에서도 한 번 안 보이네.. 냉정해..” 불편한 팔로 힘겹게 먼저 떠난 아내를 생각하며 편지를 쓰는 할아버지는 끝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는대요. 두팔이 없지만 불가능한것이 없어보이는 할아버지는 언제나 유쾌했는대요. 앞으로도 항상 행복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