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알아듣게 좀 얘기해!!” 밤늦게 집에 돌아오지 않는 엄마가 궁금해 아빠에게 얘기했지만 돌아온 대답에 벌어지는 입을 두손으로 막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집에들어오면 제일 먼저 저를 반겨주는 엄마. 그날은 다른 얘기가 없었는데 엄마가 집에 안계셨습니다. 아빠에게 물어보니 누굴 만나러 가셨다고만 말하셨는대요. “엄마는 어디 가셔서 이렇게 안 오세요?” 아빠는 주저주저하더니 대답했습니다. “사실은, 네 엄마 친딸이 찾아왔다.” 엄마의 친딸? 당황한 나머지 순간 말을 잃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빠는 지금의 어머니와 재혼하셨지요. 오랜 방황 끝에 겨우 마음을 열고 엄마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엄마께 두고 온 자식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죠. 아빠에게 물어보니 그 딸은 저와 동갑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밤잠을 설치고 다음날 아침, 제 눈치를 살피는 엄마에게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엄마, 나하고 그 애 누가 더 생일이 빨라?” “희진이 너가 나흘 빠르지.” “그럼 내가 언니네! 동생 한번 보고 싶어!” “진짜 볼거야?” “그럼! 엄마 닮았으면 엄청 이쁘겠네.” 그때처럼 활짝 웃는 엄마 얼굴은 처음봤습니다. 그렇게 엄마와 함께 동생을 처음 만났습니다. 동생이라고 하기에는 저보다 키도 크고 늘씬했지만 언니답게 웃으면서 악수를 청했죠. “내가 생일이 조금 빠르니까 언니라고 불러.” 서먹할 줄 알았는데 그 애도 웃으면서 대답하더군요. “그래요, 언니. 내가 동생 할께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제가 미안한 마음을 고백했습니다. “내가 엄마 마음 고생 많이 시켰어. 니 행복 내가 뺏은 것 같아 정말 미안해. 그동안 원망 많았을텐데 이제라도 엄마사랑 실컷 누리면서 살아. 샘 내지 않을게.” … Read more

“다 그런거겠죠…?” 이혼 후 세식구의 가장이 되어버린 저는 마흔 중반의 경단녀의 삶이 기구하다 느끼며 하루하루 눈물로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남편과 오랜 별거 끝에 결국 이혼이라는 선택을 했습니다. 졸지에 세 식구의 가장이 되어 당장 직장이 필요했죠.. 마흔 중반에 별다른 능력도 없는 제게 직업을 구하기란 너무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20년 만에 취업하는 터라 눈앞이 캄캄했죠. 고생 끝에 구한 첫 직장은 의류 매장이었는대요. 사회생활이 오랜만이라 적응이 쉽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해 열심히 노력해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제 의지와 다르게 사장님이 가게를 접는 바람에 3개월 만에 직장을 잃었습니다. 급한대로 저는 부리나케 동네 슈퍼에 취직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힘들지 않을 것 같았는데 막상 시작하니 일이 너무 힘들었고 ​결국 일주일 만에 그만두었습니다. ​이후 집 근처 식당에서 홀 서빙을 했습니다. 좌식 식당이라 허리를 수백 번 숙이며 일해야 했죠.. ​그러다 보니 허리와 무릎이 너무 아파 한달도 못가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먹고사는 게 쉽지 않구나..‘ 번듯한 직장을 구하기 어려웠기에 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가족의 생계가 달려 있기에 마냥 주저앉을 수 없었습니다. ​뽑아 준다면 모든 하겠다 다짐한 후, 제과점, 약국, 백화점 등을 거쳐 11번째 직장인 마트에 취직했습니다 ​이 매장은 하루 평균 천여 명이 드나드는 바쁜 곳인대요. 계산부터 고객 응대까지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 Read more

“저를 보고 구해주세요하는것 같았어요” 뺑소니 사고로 안타깝게 한쪽 다리를 잃고만 반려견을 보고 수술비를 모아 다시 걷게해준 의인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홀몸 노인의 반려견 수술비를 쾌척한 한 시민의 따뜻한 이야기가 공개되었습니다. 강원 지역에서 한 홀몸 노인과 그의 반려견에 대한 따뜻한 이야기가 전해진것인대요. 강원민영방송 G1은 이영식(74)씨와 그의 반려견 천견이의 이야기를 다루며 보도했습니다. 한해 전 입양한 천견이는 이 씨에게 고독한 삶 속에서 유일한 행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달 중순에 천견이가 뺑소니 사고를 당해 다리를 부러져 걷지 못하게 된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의사는 수술을 권유하면서 만약 수술을 받지 않는다면 천견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널 수 있다고 얘기했는대요. 하지만 이 씨는 500만 원이 필요한 수술비를 마련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천견이는 밥도 못 먹고 며칠 동안은 낑낑대며 고통스러워했고 이 씨는 해줄 수 있는게 없어서 그저 앉아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회사원인 박용일씨가 춘천을 업무로 방문하던 중 우연히 천견의 사연을 알게된것인대요. 박씨는 함께 동물병원을 찾아 다니며 수술비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300만 원으로 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찾아냈고 박씨는 천견이의 수술비를 마련해주었습니다. 박씨는 “강아지가 서서 나를 바라보며 ‘구해주세요’라고 말하는 … Read more

“집안일만하던 사람이 뭘 어쩌게?!” 장사를 해보겠다며 홀리듯 구매한 기성복 50벌, 뒤늦은 후회에 한숨만 쉬는데 아내는 자기가 다 팔아오겠다며 집을 나서는데..

1966년 6월, 22살이였던 아내는 환한 빛을 내며 보잘것없던 제게 시집을 왔습니다. 남이 볼까 아까워 혼자서 두고 두고 보고싶은 신부였지만 능력이 부족했던 저를 위해 결국 아내는 형편을 돕는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고운 저고리 치마도 불편하다며 벗어 던지고 이내 다른 사람들 사이에 끼어 웃음을 지으며 일을 합니다. 모든게 이 못난 저 때문입니다. 저는 작은 양복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루는 서울 청계천 평화 시장을 돌아보는 도중 기성복이 내가 파는 가격의 30%인것을 알게됐고 너무 놀라고 말았습니다. 맞춤옷을 고집하던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도 깨닫고 말았죠. 그 순간 뭔가에 홀린듯 정신을 놓고 겨울옷 50여벌을 매입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바보같은 행동이었습니다. 운영하는 양복점에 돌아와 구입한 옷들을 내려놓자 어머니와 아내가 어리둥절 했습니다. 옷을 만드는 사람이 시장 기성옷을 50여벌이나 사왔으니 얼마나 한심해 보였을까요. 심지어 이익만 생각하고 판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옷이 아무리 싸다 하더라도 우리 양복점 앞에 진열하고 팔 수는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에이라! 이 속없는 사람아! 아무리 싸다 하드라도 그렇지 어쩌자고 저 많은옷을.. 쯧쯧” 어머니의 성화에 옆에서 보고 있던 아내가 나섭니다. “어머님! 제가 팔아 볼게요. 멀리 시골 동네 남모르는 곳에 들어가 팔아 볼래요” 아내는 이 옷을 다 팔지 못하면 당장 생활에 어려움이 생길것이라는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님은, “무슨 소리여? 네가 어떻게 이걸 가지고 나가? 말도 안 된다. 버렸으면 버렸지.”라며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님이 절대로 안된다고 했지만 아내는 아침 일찍 일어나 천사 같은 얼굴로 말합니다. “여보 이거 전부 팔고 올께요!”   큰 옷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나를 향해 말했습니다. “나갔다 올게요!” 가슴이 터져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의상실을 나서는 아내의 뒷모습에 부끄러웠고 스스로를 원망했습니다. 아내는 당당하게 나섰지만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겼을 것입니다. 어디 후미진 곳에 보따리를 내려놓고 앉아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왜 이런 사람과 결혼했나!’ 하면서요. 후회하다가 엉엉 울고 있을 … Read more

“쫌씻고 꾸미고 다녀 챙피해!” 중학교 졸업식에 공장옷을 입고 온 언니, 밖에서 아는척해도 챙피해서 모른척하고 다녔는데 어느날 닥친 상황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저에게는 부모님이자 친구 같은 언니가 한명 있었습니다. 중학교 졸업식에 언니가 참석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부모님과 함께 참석하지만 저는 언니가 왔기에 창피하고 기분이 상했던 기억이 많이 남습니다. 식사를 위해 꽃을 든 양손으로 돌아가는 아이들과 달리 제 손에는 허름한 꽃 한 송이와 초라한 옷차림의 언니만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함께 하지 않아서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했다는 생각도 했는대요. 그때의 저는 너무 어려서 그런 사랑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어리석었습니다. 언니는 나보다 겨우 4살 많은 나이에도 동생인 저 때문에 가고 싶은 대학을 포기하고 일을 했습니다. 저의 등록금을 모으기 위해, 따뜻한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어려운 일들을 참고도 하며 언니는 힘들게 일했습니다. 나 때문에 자신을 꾸미지 못하고 사는 언니를 보면 창피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언니는 항상 먼지에 묻고 지친 옷을 입고 다니셨습니다. 비가내리는 어느 날, 언니는 우산을 들고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런 언니를 보고 너무 창피해서 기다리다 지쳐 언니가 집으로 갈 때까지 몰래 숨어서 기다린 적도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언니가 돈을 어떻게 벌어서 나를 먹이고 옷을 사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언니가 커다란 비닐봉지를 하나 내밀었습니다. 비닐봉지 안에는 언니가 일하는 공장에서 만든 빵이 들어있었고, 언니는 친구들과 함께 나눠먹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안됐지만 철이 없었던 저는 집을 나와서마자 비닐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그 빵을 공장에서 구걸해온것과 같은 생각이 들어 비참했습니다. 어느 날은 친구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우연히 언니를 마주쳤습니다. 언니는 낡은 공장 작업복을 입고 웃으면서 제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누구냐고 물었지만 저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해버렸습니다. 언니가 나를 향해 바라보는 그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언니는 친구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잘못 알아본 것 같다고 사과하며 걸어가는데.. 어깨가 축 쳐져 있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언니가 사준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습니다. 감기에 걸렸다며 약을 사오라고 말이죠. 언니가 걱정되긴 했지만 심부름을 시킨 언니가 얄밉기도 해서 친구들과 함께 놀다가 늦은 저녁에서야 약 한 봉지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에 도착한 저는 집안 한 구석에서 쓰러져 있는 언니를 보고 말았습니다. 언니의 얼굴은 창백하고 손이 떨리고 있었습니다. … Read more

“제가 이상한거일까요..?” 결혼 준비 중 8억짜리 제 집에 5천을 줄테니 공동명의하자는 남친 더구나 혼수는 반반을 요청했고 얼마 후 남친 엄마의 전화까지..

앞만보고 열심히 일만 하면서 살다보니 결혼도 못 하고 나이만 먹어버린 34살 여자입니다. 사실 2년전부터 만나던 남자가 있었는대요. 올 초 양가 상견례까지 하고 가을에 결혼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친구의 소개로 만난 저희는 동갑내기 커플이었고 남자 친구는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고 있는 회사원이었습니다. 저는 개인 사업자를 내고 집에서 일을 하고 있는 프리랜서고요. 회사에 취업해서 일을 한 적도 있었는데 하는 일에 비해서 월급이 너무 적고 일은 너무나도 힘들더라고요. 당시 야근까지 하고 추가 근무 수당을 다 합쳐서 200만원 겨우 넘을까말까 하는 월급을 받으면서 이렇게 살다가는 평생 남밑에서 죽어라 일만하다 갈것같았죠. 그때부터 퇴근하고 집에와서 제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이용해 새벽까지 외주일을 받아서 돈을 더 벌었어요. 처음에는 피곤하고 졸리고 내가 왜 집에 와서까지 일을 해야 하나 싶었지만 통장에 쌓여가는 돈을 보니 점점 더 욕심이 생기고 일을 늘리게 되더라고요. 새벽 2시, 3시 점점 더 일을 많이 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낮에 10시간 넘게 일을 하는 회사에서 받는 월급보다 새벽에 몇 시간 하는 일이 돈을 더 많이 벌기 시작했습니다. 이럴 거면 회사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이 일을 하는 것이 낫겠다싶어 딱 1년 더 채우던 날,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그때부터 집에서 혼자 일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다행이 직장 다닐 때 보다 2~3배는 벌게 됐습니다. 남자친구는 일반 회사의 사무직이고 별다른 특별한 자격증이나 능력이 있는건 아니라서 300만원정도 벌고 있더라고요. 뭐 서로가 돈이야 얼마를 벌던 그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고 처음 친구에게 소개받고 이 남자를 만나다 보니 사람이 순하고 말이 잘 통해서 좋았습니다. 결혼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그전에는 별로 관심 없었던 남자친구와 제 재산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남자친구는 별다른건 없고 적금으로 모으고 있던 돈 3000만 원 정도와 2년 전에 새 차로 구입한 국산 중형차가 한 대 있었습니다. 결혼하게 된다면 자기 집에서 현금으로 3000만 원 정도 더 지원해 주실 수 있다고 하길래 일단 지금은 괜찮으니까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했죠. 반면에 저는 4년 전에 집을 하나 구입한 적이 있습니다. 수도권 도시에 있는 25평 아파트였고 정말 밤낮없이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전세끼고 구입한 집입니다. 당시 엄마, 아빠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도 집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알려주셔서 당시에 집값이 4억 정도 했고 2억 5000 전세를 끼고 사게 됐죠. … Read more

보증을 선 제 잘못이지만..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고 결국 친구의 사업 부도와 함께 찾아 온 압류통지서.. 얼마 후 도망친 친구가 목격됐다는 소리에 찾아갔는데..

30년전 추운 겨울날, 월급을 압류하겠다는 통지서가 등기우편으로 집으로 날라왔습니다. 남편은 술자리에서 취기에 친구에게 보증을 서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그런 친구가 사업이 부도가 나서 도망가 버린것이었죠. 그리고 그 빚은 고스란히 보증을 선 남편에게 돌아왔습니다. 풍족한 생활을 하는것은 아니었기에 그 당시 큰돈을  한번도  만져 본적도 없는 3,000만원이라는 큰 빚을 떠안고 말았습니다. 큰딸은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고 그 밑으로 두 살 터울 아기가 셋이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막막했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고 눈앞이 캄캄하고 믿기지않는 현실에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었습니다. 재산이라고는 어렵게 마련한 집이 전부였고 남편은 집을 팔아서 급한 빚을 갚고 그렇게 낯선 곳으로 이사를 와 새롭게 시작을 해야 했습니다. 학교에서 우등생이었던 큰딸은 어려운 집안 살림에 도움이되겠다면서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시누이는 이삿짐을 싣는 내게 50만원을 주면서 급한대로  쌀과 연탄을 사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힘든 농장생활을 해야 했고 나 또한 파출부 일을 하면서 어려운 살림을 꾸려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연기처럼 사라져 찾을 수 없던 남편의 친구 행방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우리 부부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급히 받은 주소지로 달려갔습니다. 도망간 남편 친구는 집들이 빼곡히 산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는  달동에 살고 있었습니다. 겨우겨우 힘들게 걸어서 걸어서 찾아간 남편 친구집에 친구 부부는 일하러 갔는지 없었습니다. 대신 어린아이 세명이 라면 하나를 끓여 서로 먹겠다고  싸우고 있었죠. 당시 남편 친구가 빚지고 도망갔다는 말에 우리 부부는 놀라서 눈물조차 흘릴 겨를이 없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밥도 못먹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래.. 큰딸이 야간 고등학교에 다녀도.. 풍족한 살림이 아니더라도.. 우린 먹고는 살았잖아”라며 남편이 조용히 얘기하더군요. 그렇게 우리 부부는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달동네를 내려와 라면 두상자를 사서 그집에 다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쪽지에 “우린 원망 안해요. 언젠가 웃으면서 만나요.”라고 적어놓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시간은 참 빨리도 가더군요. 벌써 세월이 흘러 자식들은 모두 결혼을 시켰고 우리 부부도 사는게 바빠서 그 친구를 잊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건장한 청년이 집을 찾아왔습니다. 우리를 보자마자 넙죽 절을 하더군요.. 30년전 사주신 라면 먹고 이렇게 자랐다라면서 자신을 남편 … Read more

나들이 가던 중 발생한 교통사고로 아빠와 전 보조 다리에 의지하는 삶을 살고 있었고, 어느날 차도로 뛰어드는 아이를 본 아빠의 행동에..

우리 가족은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사고로 인해 저는 보조 다리 없이는 걷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빠도 나보다 덜 심하지만 저와 다를 바 없이 보조 다리가 필요했습니다. 성장기였던 전 사춘기 시기에 열등감에 시달려서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습니다. 밥을 먹는 것도 싫어졌고 세상이 원망스럽기도하고.. 하루하루를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쓸모 없는 인간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어준 사람은 아빠뿐이었습니다. 아빠의 사랑 덕분에 무사히 사춘기를 극복하고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고, 대학 입학하는 날 아빠는 저를 자랑스러워하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그렇게 입학식이 끝나고 나왔을 때 긴급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도로 한 가운로 어린 아이가 뛰어들고 있었는데 그 순간에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갑자기 보조 다리를 던지고 아이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린것이였습니다. 저는 눈을 의심하며 아빠가 아이를 안고 인도로 걸어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아… 아빠…?” 너무 놀라서 소리쳤지만 아빠는 못 듣는 척하고 보조 다리를 양 팔에 착용하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습니다. “엄마… 엄마도 보셨어요? 아빠가 걷는거?” 하지만 엄마의 얼굴은 차분해 보였습니다. “놀라지 말고 엄마 말 잘 들어..”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되리가 생각했어” “아빠는 사실 보조 다리가 필요 없는 정상인이야” “그때 아빠는 팔만 다치셨어..” 저는 이해할 수 없는 엄마의 말에, “그런데 왜  4년 동안이나 보조 다리를 집고 다니신 거야?” “아빠는.. 같은 아픔을 가져야만 아픈 너를 위로할 수  있다고 말하셨어..” “왜.. 그랬어..? 왜 아빠까지..”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나왔습니다.. 엄마는 울지 말라며 아빠가 아들을 위로할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셨는지 말씀해주셨습니다. 오늘은 그 어린 아이가 교통사고로 저와 같은 운명을 겪을까봐 순간 달려가신것이었죠.. 앞을 걷는 아빠를 바라보며 저의 흰색 파카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마음이 아픈 날마다 저는 항상 아빠 품에 안겨서 울었습니다. 그때마다 소리 내어 운 것은 저였지만 눈물은 아빠의 가슴 속에서 더 많이 흘러내렸던것이었습니다..

“두분 이것좀보시죠” 가정불화로 방황하는 아이를 보며 담임이였던 저는 부모를 호출했고 두사람의 손에 ‘이것’을 쥐어줬고 잠시 후 두사람은 눈물만..

제가 담당하는 초등학교 5학년 교실, 지혜의 담임인 나는 최근에 별거를 시작한 지혜 부모님과 면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별거로 민감할 나이의 아이는 나빠지는 학업성적과 자꾸 어긋나는 듯한 행동을 보였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제자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기에 부모님과 의논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다 호출했고 두 분은 이 사실을 모르셨습니다. 지혜는 늘 행복하고 활기찼던 아이였습니다. 부모님의 별거와 이혼소송전까지는 말이죠.. 지혜는 절망감만 생겼을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두 분께 납득을 시킬 수 있을까 지혜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이윽고 어머니가 들어오고 잠시 후 아버지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제가 두 분을 모셨습니다. 두 분의 따님을 그냥 나 몰라라 할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원망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남탓을 하는 것이느껴졌습니다. 부모의 이혼으로 아이가 얼마나 혼란스러워하고 있는지 제대로 설명을 하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지혜가 책상속에 버려둔 시험지를 조심히 보였드렸습니다. 먼저 어머니가 시험지를 한참을 들여다 보더니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아버지 또한 한참을 이그러진 얼굴로 시험지를 보더니 눈물로 얼룩진 시험지를 잘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감정을 추스리더니 이내 어머니의 손을 잡으시더군요. 어머니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남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전 그 모습을 보며 다시 저 가정이 합쳐져서 지혜가 예전처럼 공부도 열심히하고 명랑한 아이로 돌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제가 지혜의 부모님께 드린 시험지에는 정답이 아닌 눈물로 쓴 글씨가 있었습니다. “엄마아빠 사랑해요, 엄마 아빠 사랑해요, 엄마 아빠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