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개도 아니고..” 아버지에게 비참하게 버려져야만 했던 가수 주현미의 아픈 기억들

가수 주현미가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버려졌다’고 고백해 시청자들에게 충격을 안겨주고 있는데 최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며 아버지에게 갖고 있는 아픈 기억을 털어놨습니다.

그녀가 고백하길 “인생 총량의 법칙이라는 게 있는데 나는 어릴 때 말 그대로 개고생을 했다. 어떨때 보면 그 시간들이 그때의 아픔들이 지금 노래할 때 묻어나지 않나 싶다.”

“한창 부모님한테 떼도 쓰고 공부에 집중해야 할 사춘기 시절에 나는 동생들을 돌봐야 했고 생활비 걱정을 해야 했다. 심지어 그때 우리 아빠가 한국에서 살기 힘들다면서 우리를 남겨두고 미국으로 가버렸는데 그래서 어렸을 때 정말 힘들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도 난 이해하지 못하는 게 만약 저 세상에 있다면 난 아빠를 만나서 따질 거다. 당신도 힘들어서 떠났으면서 그 힘든 곳에 우리는 왜 남겨놨냐고”

“우리가 개도 아니고 어떻게 살려고 벌려두고 갔냐고 따질 거다. 그런 아빠가 내가 첫 아이를 낳고 얼마 후 지인을 통해 ‘직접 손자를 보고 싶다’며 한 번만 보여달라고 했는데 나는 단박에 거절했다.”

“그러자 상대가 ‘사실 아버지가 많이 아픈데 그러지 말고 한번만 보여달라’고 하자 나는 그 말조차 믿지 않고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얼마 후 주현미는 정말 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주현미는 중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화교 3세라는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4살 때 한국으로 이주해서 한의사로 일했던 화교 2세였지만 사업에 손을 댔다 실패하며 가족 이뿔뿔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주현미는 “안정된 생활에서 롤러코스터를 탔다. 아버지는 망하면 외국으로 가셨다. 그러다 거기서 괜찮으면 다시 오셔서 풍족하게 살다가 또 그러셨다.”

그녀는 공부를 잘해 약대에 가서 약사가 됐지만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때문에 가수를 하게 된 사연을 털어놨습니다.

주현미의 어머니는 그녀가 가수를 하는 걸 반대했지만 반면에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가수를 하라고 적극 권했다고 하는데 주현미의 아버지는 딸의 노래 실력을 보며 무려 15살이라는 어린 나이부터 음반을 내도록 했습니다.

당시 방송사 홍보용으로 기념음반을 300장 찍어낸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주현미가 가수로 성공한 이후 큰 돈을 벌어다 주는 상황에도 그녀의 아버지는 해외를 돌아다니며 모아둔 돈을 날리는 일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주현미는 한 tv프로에서 아버지와 소원하게 지냈던 과거를 회상하며 “돌아가신 분 얘기해서 미안한데 아버지가 와서 엄마가 모아놓은 돈을 가져간다. 엄마는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해야 한다며 그게 오랜 시간 쌓였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너무 컸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주현미는 당시 아버지를 무척이나 원망했다고 하며 게다가 주현미는 아버지와 연락 일체를 하지 않으며 첫 아이를 낳은 것 역시 tv를 통해 알렸다고 밝혔습니다.

그녀는 “난 이 이야기를 꺼내면 내가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부분이다.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서 아버지를 만나면 정말 꼭 직접 용서를 빌어야 할 부분이다.”며 “tv로 손주를 보고 나서 ‘한번 보고 싶다’고 하셨다고 하더라. 그런데 내가 거절했다.”

“근데 아버지 친구분이 아버지가 많이 아프시다 그러시더라. 그땐 왕래가 별로 없었으니까 그것도 거짓말인 줄 알았다. 그래서 나한테 막 야단을 치시더라.”

“나도 약이 올라 알지도 못하시면서 뭘 자꾸 저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시냐면서 전화를 끊었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습니다. 이어 주현미는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돌아가셨다.”

‘그 일은 내가 날 용서 못할 일’이라고 말하며 눈물을 쏟아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애잔하게 했습니다.

사실 주현미는 가수로 데뷔하기 전 대학 재학 중이던 1981년 제2회 mbc <강변가요제>에 참가해 장려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우연히 음악과의 인연이 시작되며 그녀의 마음 속에 숨어 있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강변 가요제에서 거머쥔 장려상의 여운도 잠시 여전히 노래보다 생계가 중요했던 그녀는 노래와의 인연은 접어두고 다시 공부에 매달리며 대학 생활 5년 끝에 마침내 어엿한 약사가 되게 됩니다.

그렇게 약사가 되자마자 그녀의 어머니는 약국만 하면 돈 번다는 소리에 있는돈 없는돈 다 빌려와서 졸업하자마자 급하게 약국을 차려주었는데 생각과는 달리 그녀의 약국은 장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이 대뜸 ‘마이신 주세요’라고 하면 그녀가 학교에서 배운 그대로 “손님은 지금 마이신 먹을 때가 아니에요.”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약 달라는 손님한테 오히려 먹지 말라며 강의를 하고 있으니 당연히 장사가 될 리가 없었고 이런 주현미는 하루 종일 약국을 지키고 앉아 있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강변 가요제에서 느낀 음악에 대한 갈망이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음악에 대한 미련을 억누르기 위해 가수들이 나오는 tv 방송을 일절 보지 않았고 혹시나 무대에서 노래하는 가수들을 보게 되면 ‘내가 저기 있어야 하는데’라며 동경만 할 뿐 현실은 무대에 설 방법도 없었고 그럴 환경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망해 가는 약국을 운영하던 그녀에게 어렸을 적 기념음반을 제작했던 당시 작곡가가 수년이 지난 후 아직도 그녀에게 미련이 남았는지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약국에 찾아오게 됩니다.

원래 조미미가 녹음하기로 되어 있던 메들리 음반이 이런저런 문제로 펑크가 났다며 그녀에게 메들리 음반을 같이 하자고 제안하게 됩니다.

마침 약국도 망에 가고 음악에 대한 미련이 크게 남았던 그녀는 당시 노래를 반대하던 어머니에게 ‘잠시 어디 좀 갔다 오겠다’며 약국을 맡긴 채 그 작곡가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렇게 모르는 노래를 배워가며 하루만에 22곡 녹음을 다 하니까 자정이 다 되어서 집에 도착했고 그때 어머니가 도대체 어디 갔다 온 거냐고 난리가 나기도 했습니다.

그날 이후 한달이 채 되지 않은 어느날 그녀가 남대문 시장에 뭘 사러 갔는데 그때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노래가 들려왔고 혹시나 해서 가까이 가서 들어보니 자신이 부른 노래가 맞자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때 좌판에 테이프를 파는 사람에게 이 노래 뭐냐고 물어봤더니 하는 말이 “어떤 아줌마가 불렀는데 너무 잘 나간다”라고 했고 이렇게 당시 주현미는 정식으로 데뷔한 가수 신분도 아니었지만 메들리 음반 한장으로 300만 장 이상 판매고를 올리며 가요계 전체를 뒤흔들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약사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하루아침에 톱스타가 된 그녀는 처음에는 약사와 가수 생활을 병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조그만 동네 약국에서 한 달 내내 새벽 일찍 문 열고 늦은 밤에 문 닫아서 얻는 수익보다 밤업소에서 공연을 하고 받는 출연료가 몇십배가 되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그녀로서는 가수로 전향할 만한 동기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85년 9월부터는 약국의 문을 닫고 가수 생활에만 전념하게 되었고 이후 본격적으로 방송 무대에 가수로 데뷔한 주현미는 <비 내리는 영동교>를 통해 스타덤에 오르게 됩니다.

이런 주현미는 과거 한 프로에서 막내 동생을 하늘나라로 보냈다는 가슴 아픈 사연을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막내 동생이 결핵에 걸려 중환자실에 몇 개월 동안 있었다. 하지만 내성 때문에 고치기가 힘들었다. 자식처럼 키운 남동생이라서 상심이 더 컸다. 같이 있었으면 멋진 의사가 됐을 것”이라고 털어놨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노래의 즐거움을 안겨준 그녀가 사실 이처럼 쉽지 않은 인생을 걸어 온 가수라는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오래오래 우리의 곁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길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