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그런일이..’ 믿기 힘든 배신으로 모든 재산을 잃고 스스로 정신병원을 찾아갈 수 밖에 없었던 가수 유미리 고백이 들려왔다

강변 가요제 10대 가수, 가요제 상을 휩쓴 버클리 음대 출신 유미리는 대단한 재원이었습니다. 또한 그녀의 노래 <젊음의 노트>는 대한민국 응원가로 쓰일 만큼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참 넉넉하고 평탄한 인생을 살았을것 같지만 그녀는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하게 굴곡진 길을 걸어왔는데 전 재산을 잃고 생활고와 극심한 우울증으로 극단적인 선택까지 생각했습니다.

1965년생 유미리는 초등학교 2학년 재학 중 가족을 따라 미국에 이민을가 미국 보스턴의 버클리 음악대학교 실용음악학과를 졸업한 유학파입니다.

그녀는 85년 미주 교포 학생 가요제에서 1위를 차지했고 이후 버클리 음대 2학년 재학중이던 86년 남이섬에서 열린 제7회 mbc <강변가요제>에 전미대표로 참가해 <젊음의 노트>로 대상을 받았습니다.

또 같은해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86년 10대 가수이자 신인상을 받으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젊음의 노트>는 세련된 멜로디를 가진 곡으로 155cm라는 작은 키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파워풀했던 그녀의 반전 성량은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당시 유미리는 직선적인 보컬과 울림통이 큰 가창력 때문에 이선희와도 견주어졌는데 그녀는 록적인 창법으로 매번 무대를 꽉 채웠습니다.

특히 많은 젊은이들은 당시 정부의 답답한 상황을 투영한 노래 가사에 공감했고 시원스럽게 뻗어나가는 유미리의 음색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습니다.

<젊음의 노트>는 중고등학교 운동회에서 응원가로도 자주 불렸고 87년에는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는 국가대표 선수들이 좋아하는 노래 9위에도 뽑혔습니다.

대한민국의 응원가로 쓰일 만큼 사랑을 받은 곡 덕분에 유미리 역시 유명세를 떨쳤는데 아쉽게도 이후 앨범들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유미리는 정규 1집 <가슴에 기대어 한번 더> 2집 <첫인상> 등으로 활동했으며 미국으로 돌아가 팝뮤직을 배운 뒤 모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92년 김범용이 작곡한 <하이하이하이>를 발표해 활동했으나 젊음의 노트로 활동했던 때만큼 사랑받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유미리는 학업을 위해 다시 미국으로 떠나면서 활동을 중단했으며 간혹 얼굴을 비쳤는데 얼마 전에는 그녀가 굉장히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는 근황을 전해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국민 응원가로 불렸던 <젊음의 노트> 활동 당시 유미리는 정말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그 때문에 벌어들인 돈도 많았을 텐데 아쉽게도 유미리의 수중에는 단 한푼도 남지 않았습니다.

당시 매니저가 그녀가 벌어들인 돈 모두를 앗아갔기 때문입니다. “가수로 인기가 많았을 당시에는 매니저분이 다 관리를 했어요. tv출연을 할 때는 그 모은 돈이 다 매니저한테 가는거예요.”

“노래만 하라고 하면 그 장소에 같이 가서 노래하고 내려오고 그랬어요. 노래하면서 제가 돈을 받아야 한다는 건 생각을 못했어요. 누가 말을 안 해주니까요.”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아 배신감이 컸던 유미리는 소속사를 나와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가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92년 귀국해 가수 활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미국에 있던 사이 한국 가요계는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는데 그 즈음에서 서태지가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서태지의 등장으로 정상에 있던 스타 가수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는데 한참 공백을 가졌던 유미리 역시 격변한 시대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김범용이 작곡한 노래 <하이하이하이>로 무대에 올랐으나 대중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한마디로 망한 거죠. 지금이야 웃지만 당시엔 정말 난감했어요. 제가 아무리 팝뮤직을 전공했다지만 원래 스타일이 있는데 갑자기 막 랩을 하고 그러긴 힘들잖아요.”

“한국에 돌아와 보니 80년대 가수들도 다 명맥이 끊겼더라고요. 저라고 뭐 달랐겠어요. 음반을 내고 싶었지만 솔직히 용기가 안 났어요.”

이런 상황에서 부모님께 손을 벌릴 법도 한데 유미리는 홀로 씩씩하게 타개하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녀는 밤무대, 라이브 카페 등에서 노래를 불렀고 강사들에게 영어 교수법을 가르치면서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내가 한 때는 정말 잘 나갔는데 그런 자격지심은 없었어요. 돈이야 원래 있다가도 없고 그렇잖아요. 원체 긍정적이다. 보니 이제껏 버텨올 수도 있었겠죠.”

유미리는 본인이 인정했듯이 정말 밝고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타국인 미국에 가서도 주눅이 들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대학교때까지 학창 시절은 거의 미국에서 보냈어요. 늘 밝은 편이어서 외국 아이들을 휘어잡고 다닐 정도로 잘 어울렸어요. 워낙 잘 놀고 노래 잘하고 목소리 크기로 유명했어요. 날 모르면 간첩일 정도였죠.”

하지만 늘 유쾌한 그녀는 한때 극단적인 생각을 할 만큼 암울함에 빠져 있었습니다. 한창 전성기에 매니저에게 모든 돈을 착취당한 것뿐 아니라 유미리는 한번 더 사기를 당했습니다.

사기를 당하면서 유미리는 담보로 잡혔던 집과 재산을 모두 날린 것은 물론 억대의 빚까지 지고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음반 준비가 물거품이 된 것은 기본이었습니다.

이후 유미리는 식당 등에서 아르바이트하며 극심한 생활고를 이겨내고자 했지만 그조차 여의치 않았고 파산 신청과 개인회생 신청을 해야 할 정도로 상황은 암담했습니다.

“2007년 몇억을 사기당해 집 한채를 날렸어요. 16층에 살았는데 뛰어내리려고 베란다까지 갔어요. 집쪽에 차가 다니는 도로가 있는데 저 차에 부딪히면 편하게 죽겠다는 나쁜 생각까지 했어요. 그리고 뛰어내리려 할 때 이러면 안 되지 싶어 병원에 전화했어요.”

매일 죽기 위해 사는 사람 같은 삶을 살고 있던 유미리는 걱정하실까 봐 부모님께 연락도 못하고 홀로 끙끙 안았습니다.

어느 날은 상황이 심각하게 흘러가 목숨을 끊으려고까지 했지만 다행히 벼랑 끝에서 유미리는 다시 정신을 차렸고 그 길로 정신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우울증이 중증을 넘어선 상태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힘들었던 당시를 생각하며 유미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완전히 딴 사람이 되더군요. 기운도 없고 그저 누워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지냈어요. 이성적으로 사고하려 해도 ‘죽으면 편해질 거야’라는 생각만 들더라고요.”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상상 지나가는 차에 뛰어드는 상상을 계속했어요. 그건 정말 겪어본 사람 아니면 모르는 거죠.” 그녀는 우울증에 대한 태도 개선도 시급하다고 말했습니다.

“일단 연예인들의 극단적인 선택 등으로 인식은 많이 개선됐지만 아직 우울증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해요. 다 죽어가던 와중에 모 대학병원에 죽고 싶다고 전화하니 예약이 다 찼으니 나중에 오라며 사무적으로 대하더군요. 미친 사람으로 호들갑 떠는 것도 냉담하게 대하는 것도 곤란해요.”

다행히 유미리는 극적으로 병원을 찾아 우울증을 치료받을 수 있었고 상황은 점점 나아져 지금은 약물 치료만 받고 있는 상태라고 전했습니다.

그녀의 사연을 들은 네티즌들은 ‘활동 당시 밝고 씩씩했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데 그런 일들을 겪었다니 너무 안타깝네요.’ ‘나쁜 사람들한테 유린당하고 목숨을 저버리려고까지 했다니 눈물이 나네요.’ ‘그래도 위기를 잘 이겨내길 바라요’라며 격려의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한때는 국민 가수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던 유미리, 그녀는 두 번의 시련을 맞이하며 많은 것을 잃어야 했습니다.

파산을 신청해야 할 정도로 극심한 생활고에 유미리는 식당 구인 광고들을 보며 여기저기 떠돌아야 했고 그럼에도 상황은 쉽사리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심각한 우울증에 세상을 등지려고까지 했습니다.

이토록 열심히 살아온 그녀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져 무대에서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을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