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세요..” 수많은 명곡을 탄생시켰지만 결국.. 큰 돈은 불과하고 건강까지 좋지 않다는 송창식의 안타까운 사연이 들려왔다

7, 80년대 수많은 히트곡으로 한국 가요계를 장악한 송창식은 얼마 전 아내와 25년째 별거 중이라고 밝혀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과거 그가 돈을 잘벌던 시절, 여기저기 사람들이 돈을 빌려갔지만 돈을 꿔 간 사람들 중 제대로 갚은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리고 훗날 그의 재산을 가장 많이 이용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 그는 독신주의자를 자신의 타고난 운명이라 생각해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이론적으로 무장하고 다닐 정도였는데 그러나 한 여자를 만나는 순간 자신이 독신주의자라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후 그는 과연 내가 결혼 생활을 잘할 수 있을지 겁이 났지만 그래도 서로 좋아하니 결국 결혼을 하기로 합니다. 훗날 그의 고백에 따르면 ‘결혼하고 딱 일주일 만에 이 결혼은 잘못됐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

1947년 인천에서 1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송창식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땅이 많고 트럭도 몇대 굴리는 부자였으나 송창식 그가 4살이 되던해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6.25 전쟁때 세상을 떠나버렸고 이후 어머니가 여동생과 송창식을 할아버지 집에 맡기고 집을 나가버리면서 전쟁 이후로는 부모도 없이 조부모 슬하에서 불우한 학창시절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참고로 집을 나간 그의 어머니는 훗날 송창식이 가수왕을 차지하며 잘 나갈때 다시 재회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부모님을 떠나 보낸 그는 당시 방 한칸을 일곱 식구가 거처로 지내야 할 만큼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그때는 집이 너무 좁아 몸을 절묘하게 지그재그로 엮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한편 어릴 때부터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그는 8살 때부터 곡을 쓸 줄 알게 되면서 주변으로부터 모차르트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공부도 정말 잘해서 당시 우수한 성적의 학생들이 시험에 합격해야 갈 수 있는 인천 최고의 명문 인천중학교도 초등학교를 전체 1등으로 졸업하면서 시험도 치르지 않고 특례 입학을 했습니다.

그렇게 송창식은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똘똘한 아이였지만 그러나 또 의외로 동네에서는 껌좀씹는 노는 아이들과도 어울려 지내며 당시 ‘해광사’에서 ‘맨날 싸움 얘기나 하고 시끄럽게 떠들다가 스님에게 쫓겨나기도 참 많이 쫓겨났다’고 했습니다.

공부를 잘했던 그는 중학교 1학년때 인천여상 강당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을 우연히 보게 된 후 그의 인생은 또다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공연에서 손끝으로 오케스트라를 움직이는 지휘자가 너무나 멋있었던 그는 그때부터 지휘자가 돼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이후 송창식 그는 집안 어른들의 말과 선생님의 말을 거역한 채 결국 서울예고 성악과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서울예고는 부유한 집안의 자녀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로 송창식은 당시 너무나도 가난해서 실기 시험을 치르지 못해 유급 통지서를 받았고 그 길로 학교에 나가지 않아 끝내 중퇴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때 예고를 중퇴하면서 훗날 클래식이 아닌 대중 음악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또한 당시 그는 비록 학교는 중퇴했지만 부지런히 음악을 독학을 해 이때부터 클래식과 팝송을 넘어 국악과 화성악을 넘나들며 음악 이론서를 모조리 섭렵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20살이 되던 1966년 여전히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는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에게 밥 한끼 얻어먹기 위해 홍익대나 서울대 음대로 자주 갔었습니다.

당시 그는 대학생인것처럼 보이기 위해 서울대 배지를 달고 다녔으며 그렇게 캠퍼스 잔디밭에서 대학생인 척하며 기타 치고 노래 부르고 이따금 밥도 얻어 먹던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행운이 찾아오게 됩니다.

당시 종로 ‘세시봉’이란 음악감상실 사장의 아들이 그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대학생의 밤’이란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 노래를 불러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으면서 세시봉에 합류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는 마침내 노숙과 밥 동냥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세시봉 출신으로 윤형주와 ‘트윈폴리오’를 만들어 본격적인 가수로도 데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그의 고백에 따르면 ‘이 팀을 결성할 때부터 당시 윤형주는 연세대 의대생으로 언젠가는 팀을 관둘 것으로 예상했다’고 합니다.

이후 그의 예상대로 윤형주는 송창식 그와 한 마디의 상의도 없이 1969년 초 두 사람이 리사이틀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하는데 윤형주가 ‘이번을 마지막으로 트윈 폴리오는 끝이다’라고 말하면서 어쩔 수 없이 그 뒤에 솔로로 데뷔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팀에서 솔로로 전향한 그는 이후 <피리 부는 사나이> <고래사냥> <왜불러> 등 수많은 곡들이 대중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얻으면서 오히려 팀으로 활동할때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아 당시 가요 대상을 차지하며 가수왕이 되는 등 한국 가요계를 장악하기도 했습니다.

가수로 잘나가던 그때 송창식은 독신주의자를 천명하고 살며, 결혼을 하면 안되는 이유를 이론적으로 무장하고 다닐 정도였는데 어느날 한 여자를 만나는 순간 자신이 독신주의자라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 여자는 훗날 송창식의 부인으로 그가 중퇴했던 서울예고 동창생이었고 미국 공연을 계기로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내로부터 찌릿한 건 없었고 오히려 자신과 전혀 어울릴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당시 지금의 아내와 자신은 사회적 지위와 품격이 달랐다”고 했습니다.

송창식의 고백에 따르면 “그때의 아내는 힘있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상류사회 비즈니스 우먼이었고 자신도 유명 가수이긴 했지만 그러나 본인은 아내에 비하면 하류 사회 출신의 세련되지도 않았으며 아무튼 아내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미모의 엘리트 여성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아내가 연말 파티에 같이 갈 파트너를 그에게 소개해 달라고 했고 당시 그는 ‘자신의 주변에는 그 사람에게 갖다 붙일 사람이 없어서 결국 못 구했다’고 하니 아내가 ‘그럼 너라도 같이 가자’고 해서 그렇게 두 사람은 송년 파티에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새해가 밝은 첫날 12시, 남녀 키스타임이 있었고 다들 하니까 지금의 아내가 자신에게도 키스 하라고 말하면서 순간 송창식은 당황했지만 결국 해버렸고 그렇게 그날 이후 두 사람의 연애가 시작됩니다.

이후 독신주의자였던 송창식은 연애 시작 한달만에 아내의 입에서 결혼 이야기가 나오고 말았습니다. 당시 그는 과연 내가 결혼 생활을 잘 할 수 있을지라며 많은 걱정을 했지만 그래도 서로 좋아하니까 결국 하기로 했지만 ‘결혼은 생각만큼 낭만적이지도 그리고 행복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훗날 그의 고백에 따르면 “자신은 형식적인 존재 소품 같은 존재”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으며 또한 송창식 그가 “가수로서의 존재 가치가 꽤 컸지만 아내에겐 별로 눈에 들어오는 가치가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이후 25년째 별거 중이며 또한 그의 저작권 수입이 1년에 1억원쯤 되는데 그건 평생을 아내가 사업한다고 다 쓰고 자신은 오로지 공연 수입으로 먹고 사는데 그러나 최근 좋지 않은 시국과 더불어 그의 성대가 좋지 않아 많은 걱정이 든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송창식 그가 고백하길 “내가 살면서 그때 그거 하지 말았어야 했어라고 할 만한 일은 딱 하나 결혼이었지만 그렇다고 후회할 일은 아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냥 하게 된 것이고 내 인생에서 어차피 거쳐야 할 일이었을 것이다. 돌아보니 모든 게 그랬다. 지는게 싫었지만 좌절도 있었고 최고의 자부심을 가졌지만 착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그래도 이 정도의 가수가 된 것은 전혀 손해 본 인생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현재까지도 수많은 팬들의 그의 노래를 두고 ‘가슴을 울리는 최고의 가수’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늘 행복한 미소를 잃지 않고 건강하시길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