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던 적금 다 깨고 연금도 못냈어요..” 신내림 받은것처럼 아프고 생활고에 시달렸다는 임성민의 안타까운 사연이 들려왔습니다

아나운서와 엔터테이너의 합성어인 아나테이너, 그중에서도 원조로 불렸던 임성민이 최근 한 방송에서 그동안 남모르게 겪었던 아픔을 고백했습니다.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난 임성민은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와 연세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을 졸업한 인재로 94년 kbs 공채 20기 아나운서로 합격했습니다.

그녀는 아나운서시절 다양한 프로그램의 mc를 맡고 예능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렸는데 아나테이너라는 단어도 그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인기 아나운서로 총망받던 임성민은 2001년 kbs 퇴사와 함께 연기자로서 전업을 선언한 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애자언니 민자> <외과의사 봉달희> 등의 작품에 출연하며 연기를 했고 프리랜서로 mc도 맡으며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리고 2011년에는 서강대학교에서 영화제작을 지도하는 미국인 교수 마이클 엉거와 결혼했습니다. 그녀의 남편 마이클 엉거는 탄탄한 직업은 물론 집안 배경도 대단하다고 알려졌습니다.

그의 부친은 독일계 미국인으로 변호사이자 한국전 참전 용사이고 모친은 미국 유명 식품회사 레드닷그룹 창업자의 외동딸로 동양화풍의 영향을 받은 화가입니다.

그런 대단한 가정에서 자란 마이클 엉거는 미국 아이비리그의 브라운대를 졸업하고 컬럼비아대학원에서 영화학을 전공한 엘리트입니다.

그는 작가, 영화 및 뮤직비디오 감독, 편집자, 프로듀서 등 영화계 다방면에서 활약했고 2001년에는 영화 디자이너로 뉴욕 국제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받을 정도로 그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한국전 참전용사인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한국전을 다룬 다큐멘터리 <파 프롬 포가튼>도 발표했습니다. 그는 뉴욕필름아카데미 부학장 시절, 카이스트에서도 강의했고 2008년 2월 지인의 소개로 임성민을 처음 만나게됩니다.

임성민은 영어교육과 출신으로 마이클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대화가 잘 통했는데 영화와 음악이라는 공통 관심사로 금세 가까워졌습니다.

마이클은 임성민을 처음 보자마자 자신의 소울메이트라고 생각했고 임성민은 두번째 만나면서 그와 결혼을 예감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서로에게 호감을 품은 두사람은 그해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인연이 이어졌습니다.

마이클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길 거라는 예감이 들었어요. 한국 오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기분이 이상했어요.”

임성민은 마이클이 자신을 향한 호감을 전혀 숨기지 못했고 적극적인 구애를 했다고 밝혔는데 임성민에게 푹 빠져버린 마이클은 미국에서 쌓은 모든 경력을 뒤로 하고 한국행을 택했습니다.

임성민을 보기 위해 한국행을 택한 마이클은 만난지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그녀에게 반지를 주며 ‘나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로 만들어줄래’라는 말과 함께 프러포즈했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2011년 10월 서울 광진구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식을 올리며 결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만난 인연이기에 임성민은 보수적인 자신의 집안에서 반대를 하지 않겠느냐는 걱정도 했지만 다행히 그러지 않았습니다.

임성민이 나이 40을 넘어서도 결혼 생각이 전혀없다가 데려간 상대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혼은 흔쾌히 허락했던 아버지가 심한 반대로 그녀에게 큰 슬픔을 안긴적도 있었습니다.

임성민을 아나운서 출신 배우라고 아는 사람이 많으나 사실 그녀는 아나운서에 합격하기 전인 91년 kbs 14기 공채 탤런트로 이미 합격한 바 있습니다.

당시 동기로는 이병헌, 손현주, 김정난 등이 있는데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받는 배우들입니다. 임성민 역시 그들처럼 왕성한 활동을 할 것이라는 꿈을 품고 탤런트 시험에 합격했으나 가족의 극심한 반대로 아무런 활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이웅진 감독님이 저희를 관리했는데 아버지가 반대해서 못나갈것 같다고 했더니 ‘주말 드라마 들어가는데 맡을 배역이 있다’고 하셨어요.”

“감독님이 앞으로 연기자가 최고의 직업이 될거라고 했는데 저한테 그런 소리를 해도 소용이 없었죠.”

임성민의 아버지는 그녀가 탤런트로 데뷔한다는 소식을 듣고 앓아눕기까지 했습니다.

“집에 말씀드렸더니 아버지가 일주일동안 회사를 안가셨어요. 집에 딴따라가 나왔다고 드러누우셨죠. 방송국에서 뭘하고 싶으면 기자나 PD를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아나운서를 하겠다고 했어요.”

임성민은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로 탤런트 활동을 하지 못하는 대신에 1994년 KBS 공채 시험을 본 후 아나운서로 합격해 활동했습니다.

그녀는 90년대 최고 인기아나운서로 활약했지만 연기에 대한 열망을 감추지 못했고 아나운서라는 직업에 대한 회의만 느꼈습니다.

“아나운서 일은 나한테 맞지 않는 옷이었어요. 내가 원래 있어야 할 곳은 세트장이고 야외 촬영장인데 몸이 아팠다고 해야 하나요. 비슷한 거로 치면 신내림처럼 잠은 안오고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만 났어요.”

연기에 대한 갈증이 심했던 임성민은 결국 2001년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배우 활동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야심차게 시작했던 연기 활동은 그녀에게 시련을 안겨줬습니다.

극심한 생활고를 겪게 된 것입니다. “2005년에는 정말 일이 없었는데 아무도 안 만났죠. 돈이 없으니까 사람을 만나면 주로 사는편이었는데 수입이 없어 통장이 비었어요. 있었던 적금 다 깨고 의료보험 국민연금도 못냈죠.”

국민연금과 의료보험비를 못 낼 지경이 된 임성민은 계속되는 독촉 전화에 솔직하게 자신의 사정을 말했습니다. 

“제가 임성민인데요. 요즘 일이 없어서 의료 보험비를 못 내겠어요.”

소득이 전혀 없기에 납부가 불가능했던 상황이었는데 결국 임성민은 국민연금 일시중지 요청까지 해야만 했습니다. 그녀는 미국행을 결정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일이 없어서’라고 밝혔습니다.

“한국에서 한계를 매일 느꼈어요. 정체되는 느낌이 많이 들었고 나이가 들면서 한계를 느껴 미국쪽의 일을 적극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미국에서 시야를 넓힌 임성미는 결혼 후에도 자기 일을 위해 미국과 한국을 오가고 있는데 여기에는 남편의 든든한 내조가 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그녀는 “남편은 처음부터 제의를 지지해줬어요. 지금도 가장 의지가 되는 사람이에요.”라며 마이클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습니다.

최근 임성민이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걸어온 전원주를 만나 상담을 하는 장면이 전파를 탔습니다. 전원주는 안정적인 직업인 교사를 그만두고 어머니의 극심한 반대에도 배우의 길에 들어선 후 데뷔 60년동안 꾸준히 연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임성민은 그녀를 롤모델로 두고 꾸준히 연기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며 조언을 구했는데 그 말을 들은 전원주는 임성민에게 “공짜는 없다. 늘 열심히 앞을 향해 나가야 한다”는 대답을 전했습니다.

노력하는 배우 임성민의 차기작 소식이 곧 들려오길 바라며 그녀의 화려한 앞날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