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활발히 활동하다 어느 날부터인가 매체를 통해 모습을 들어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연예계 은퇴 후 다른 일을 하게 된다면 잘 풀리길 바라면 되지만 다시 볼 수 없게 되는 경우에는 안타까움과 동시에 마음이 허전해지기도 합니다.

배우 이신재는 1965년 KBS 공채 5기 탤런트로 데뷔하여 수많은 한국 사극과 드라마에서 주연으로 활동하였고 1987년 KBS 연기대상 우수연기상을 수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2006년 드라마 <연개소문>을 끝으로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다 오랜만에 모습을 비춘 그는 자신이 식도암 투병을 한 사실을 알렸습니다.
“언제부턴가 자극적인 음식을 먹으니 속이 쓰렸어요. 식도염인 줄 알고 약을 먹었는데 내시경 검사 결과 암이었어요. 다행히 초기에 발견해 완치가 가능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어요. 배우가 목소리가 안 나오면 무슨 소용이에요. 그때 우울증이 왔어요.”

그는 우울증을 심하게 겪었던 상황을 전했습니다. “한번은 아들이 운전을 하고 제가 조수석에 타고 아내가 뒷좌석에 타고 있었어요. 아들에게 엄마 잘 부탁한다고 말하면서 뛰어내리고 싶은 적도 있었어요.”
“결국 참았고 정신과를 찾아 3일치 약을 먹으니 나쁜 생각이 싹 사라지더라고요.” 이신재는 30년 넘게 우정을 이어오고 있는 배우 남일우, 최정훈과 함께 토크 방송에 출연했습니다.

MC들이 ‘세분의 서열은 어떻게 되나요?’라는 물음에 이들은 최정훈이 가장 선배라고 밝혔습니다. 최정훈은 KBS 1기 탤런트로 세사람 중 가장 먼저 배우 활동을 시작했고 남일우는 1959년 KBS 성우 3기로 데뷔했다가 성우 활동 중에 KBS 4기 공채 탤런트에 합격해 배우 활동을 병행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신재는 KBS 5기 탤런트로 왕성한 활동을 했는데 이들은 우정의 비결로 먼저 ‘구인회’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구인회란 KBS 톱 연기자들이 뭉친 모임입니다.
이에 대해 이신재는 “다들 모이기가 힘들어요. 다 모이려고 해도 누군가는 촬영 스케줄이 있어요. 그럼 나머지 사람들만 모이는 거죠.”라며 34년째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우정의 비결에 대해 남일우는 “우리 셋다 철이 없어서 그래요”라고 응답해 시청자들의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또한 세사람은 70년대 방송 환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요.
MC는 “당시에는 술 마시는 장면이 있으면 진짜 술을 마셨다는 게 사실인가요?”라고 물었고 이에 이신재는 “물론이죠. 그뿐만 아니라 우스운 일이 많았어요.”라며 말문을 뗐습니다.
그는 “당시 드라마는 모두 생방송으로 진행됐어요. 한번은 사극에서 사약을 마셔야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소품실에서 한약을 준비하지 못해 세트에 칠하는 페인트로 얼렁뚱땅 한약을 만들어 그걸 방송 중 들이키기도 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는 “방송가에 소품을 먹으면 3년 재수 없다는 말이 있어요. 배우들이 자꾸 소품으로 나온 음식을 먹으니 소품실에서 배우들이 못 먹게 닭을 덜 삶아 내놓기도 했어요.”라고 밝혀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당시의 인기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는데요. 남일우는 “1960년대 초의 짜장면이 15원이었어요. 최정훈 선배가 한시간짜리 프로 프로그램 <금요무대>에 출연하고 3150원의 출연료를 받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최정훈은 “그 당시 촬영했던 드라마가 <아버지 아들>이었는데 대본은 늦게 나왔지, 외우지도 못했지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방송을 했어요.”

“방송 끝나고 링거 꽂고 병원 갔다가 다시 링거 맞고 촬영장 오고 그랬어요.”라고 말하며 남다른 연기 열정을 드러냈습니다. 특히 최정훈은 격투 승마 씬도 직접했다고 밝혔는데요.
대역은 있었지만 본인이 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또한 남일우는 최정훈에 대해 “1970년대 최고 특A급 배우”였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현재 장동건 현빈급 배우였죠”라고 말하며 그 당시 최정훈 인기를 가늠케 했습니다.
하지만 이신재는 그로부터 더욱 방송에 보이지 않다가 2020년 2월 24일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가 전해졌습니다. 이신재가 투병했던 식도암에 걸려 오랜 시간 투병을 이어가다 결국 세상을 떠난 인물도 있습니다.

<향수> <이별노래> <가을 편지> 등을 불러 ‘음유시인’ ‘시를 노래하는 가수’로 이름을 알린 가수 이동원입니다. 특히 향수는 한국 음악계에 큰 영향향을 끼친 곡입니다.
대중가요와 클래식의 만남의 물꼬를 트게 되어 천박한 음악 등의 구분은 향수 덕분에 모두 사라졌고 <열린 음악회> 같은 프로도 생기며 클래식과 대중가요가 같은 무대에 설 수 있게 만든 전환점이 됩니다.
사회적인 고정관념이 깨진 것이기에 향수의 등장이 노래 자체보다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고인은 서정적인 가사를 담은 노래를 즐겨 불렀습니다.

향수 이외에도 앞서 언급되었던 정호승의 <이별노래> 백창우의 <내사람이여> 등 시를 노랫말 삼은 곡도 여럿 이었습니다. <내사람이어>는 이후 김광석도 불렀고 2011년 YB가 <나는 가수다>에서 리메이크 했습니다.
<가을 편지>는 고은 시인이 지은 노랫말로 70년대 가수 최양숙이 처음 부른 곡으로 이후 이동원이 부른 버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국민 가요라는 칭호가 붙어 많은 사랑을 받았던 향수는 당시 800만 장 가까이 판매되었고 여전히 많은 이들이 찾는 곡 중 하나입니다.

그랬기에 이동원은 많은 돈을 벌었지만 정지용 시인의 고향인 충북 옥천에 스튜디오 겸 집을 마련하기 위해 땅을 사서 건물을 지으려 했던 것이 잘못되면서 큰 돈을 들여 지은 집을 통째로 날리게 되고 이후 청도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그는 잘못된 전후 사정에 대해서 공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정지용 시인의 고향 사람들이 연루된 것이어서 그냥 가슴에 묻어두고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비를 들여 옥천의 정지용 흉상을 건립했을 만큼 그 지역에 애착을 갖고 있던 그였기에 정착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의 아픔이 컸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로 인해 가정 불화까지 겪었으나 그는 “청도에서 지낸 세월이 내 음악에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에 전화위복”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는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나이트클럽 등 밤업소에 출연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고생을 하긴 했지만 그는 “자신의 음악은 그런 곳에 맞지 않는다며 생활고 탓에 그런 곳에 나가면 목소리가 망가지게 되어 있다”고 이유를 밝혔습니다.
그는 “뭐 대단한 의식이 있어서가 아니고 나를 위해서 일관된 태도를 유지해 왔어요. 그래서 내 목소리를 지킬 수 있었어요. 가수는 공연과 음반 활동으로만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라며 자신의 소신을 전했습니다.

한편 이동원은 1970년대 초반에 명동에서 음악 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전유성과 교우했습니다. 그가 20대 후반에 서울 청운동에 11평짜리 아파트를 얻어 신혼 살림을 했던 시기, 전유성 또한 결혼을 했습니다.
전유성이 이동원에게 “신혼여행을 너희 집으로 가면 안 되겠느냐”라고 하는 말에 오라고 해서 함께 술을 마셨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두 사람은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물 맑은 경북 청도에 함께 지내며 교류를 이어왔고 이동원의 투병 마지막까지 곁에서 전유성은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동원은 평소 절친했던 전유성이 있는 전북 남원으로 옮겨 식도암 말기 투병 생활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수술적 접근도 시도할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었고 결국 그는 우리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의 투병을 마지막까지 지켜본 전유성은 “투병 중이던 이동원이 지리산에서 살고 싶다고해 이리로 내려와 내 지리산 집에서 머물렀어요. 어제 갑자기 위독해져 곁을 떠났습니다.”라고 전했습니다.

이신재의 마지막 TV출연은 2016년 KBS 연기대상 시상식이었는데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활약했던 고인이 부디 그곳에서 편히 쉬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