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ㅇ에 불과하다” 100억을 잃은 뽕짝왕 이박사, 재기하려던 앞에 태진아가 던진 한마디, 지금 확인해보세요

100억을 잃은 뽕짝왕 이박사, 재기하려던 앞에 태진아가 던진 충격적인 한마디

<몽키매직> <영맨> 등의 곡을 히트시키며 ‘테크노 뽕짝’의 창시자라고 불린 가수 이박사는 2000년대 초반 온 국민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의 진면모를 알아본 것은 한국이 아닌 옆나라 일본이었는데 한국에서 인기를 끌기 전 그는 일본에서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인기 TV프로에 잇따라 출연했고 일본 최대의 제약업체에서는 이박사를 CF모델로 기용할정도 였습니다. 또한 앨범 판매고도  엄청났는데요.

거기다 일본의 톱가수들도 꿈의 무대로 불리는 도쿄 부도칸에서 데뷔 공연을 치른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대중들의 눈에서 사라지게되고 그렇게 공백 기간을 갖게된 이박사의 근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박사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의 나이가 61살로 이후 아버지는 이박사가 갓난 아기때 객지에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이 박사는 초등학교때부터 가요를 시작하여 신동소리를 들었고 15살때부터 록 음악에 심취하게 됩니다.

그러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경기도 민요까지 접하였다가 결국 19세에 들어서 뽕짝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 박사는 17살 되던 해에 처음으로 요정에서 3개월 동안 잔심부름 일을 했다고 하는데요. 이후 양복점, 이발소, 우체국 편지배달, 중국집 음식배달, 가방 심부름, 당구장 등의 일을 전전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20살, 만 19세가 된 해인 1973년 5월 KBS에서 <민속백일장>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지역예선에 입상해 서울 본선 참가를 했지만 떨어지게 됩니다.

이후 서울에서 구두닦기를 하면서 1년을 전전하다가 고향으로 내려가 양복점과 요정 아가씨를 상대로 창을 가르치는 일을 하며 1976년 이후 아예 양복점을 세 차례나 경영하게 됩니다.

하지만 두 차례 망하면서 남의 양복점 가서 일하면서 돈을 모으고 세 번째 양복점을 개업하게 되지만 양복점을 운영하던 중 흥미가 떨어져 자신의 양복점을 남한테 넘기고 노래 부르면서 일할 수 있는 관광버스 가이드일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이 박사는 관광버스 가이드로 일하며 관광객들에게 안내와 더불어 노래를 불러주었다고 하는데요. 당시 관광버스의 리듬박스라는 일종의 드럼머신이 장치가 있었는데 이걸 틀어놓고 그 박자에 맞춰 노래를 불러주곤 했습니다.

이박사가 결정적으로 유명해지게된 계기는 관광버스 가이드를 하다 우연한 기회에 메들리 음악을 녹음하게 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렇게 1989년 국내 트로트 시장을 발칵 뒤집은 <신바람 이박사>가 탄생했습니다.

테크노와 EDM을 결합한 노래를 만들어내면서 트로트의 새 지평을 연 인물로도 불리기도 합니다. 매번 신나는 음악으로 대중들에게 신바람을 일으키겠다는 이박사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이박사는 제한된 영역에서 히트였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이후 1995년 일본에 진출하게 됩니다. 샘플을 들었던 사람 중에 운좋게도 소니뮤직 대표가 있어 쉽게 앨범을 내고 일본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앨범을 내고 지명도를 얻으며 <뽕짝으로 키가 5cm 컸다> 등의 다양한 음반을 내며 스타로서 자리매김을 했는데요.

“과거엔 130곡을 부르고도 제대로 된 돈을 받지 못했고 1995년도까지 거의 무명에 가까운 생활을 했어요.”

“1995년도 이후엔 일본에 진출해서 앨범을 냈는데 첫 앨범부터 100만 장이 팔렸어요. 우연치 않은 기회였고 큰 기대도 없었는데 깜짝 놀랐어요.”

“동경대학교에서 한국의 트로트에 대해 강연도 했어요. 인지도를 쌓고 앨범으로는 성공을 했지만 정말 힘든 생활이었어요. 음식이 정말 안 맞더라고요.”

“심지어 상에서 버렸던 김치를 물에 씻어서 먹기까지 했어요. 그 정도로 한국 음식이 그립더라고요. 일본에서 한국을 부르면 당시 돈으로 1천만 원을 줬어요. 세곡을 부르면 3천만 원을 줬으니 자연히 부을 축적하게 됐어요.”

그렇게 국내로 돌아온 이 박사는 <몽키매직> <영맨> 등의 곡을 히트시키며 2천년대 초반까지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당시 인기에 대해 그는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아마 임영웅, 송가인보다도 인기가 많았을 거예요. 일본에 있었을 당시 나와 대화하기 위해 책을 사서 한국어를 배우던 신세대 팬들도 많았었어요.”

“노랑 머리, 빨강 머리를 한 2,30대 신세대 팬들이 내 사인을 받기 위해 긴 줄을 서고 절을 열번이나 하면서 사진 찍어달라고 하고 그랬었어요. 그런 모습이 참 신기했던 기억이 나요. 여러모로 일본에서 국위 선양을 한 가수인 셈인데 나라에선 공로패를 안줘요.”

안타깝게도 그의 전성기는 짧게 끝났습니다. 사고로 다리 부상을 당하면서 활동에 제동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이박사는 한국에서 한창 인기 있을 때 집 앞에 나무를 다듬다가 다리를 다쳐 몇 년간 활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위약금 등으로 100억에 달하는 가산까지 모두 사라지고 생활고로 이혼을 하게 됩니다.

“저희 집이 3층인데 나무를 자르러 올라갔다. 내려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우르르 쾅쾅 하더니 비가 왔어요.”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야 하는데 1미터도 안돼 보여 3층에서 그냥 뛰어내려 왼쪽 뒤꿈치가 으스러졌어요.”

불의의 사고는 그에게 많은 것을 앗아갔습니다. 이박사는 결국 이후 이런 인생의 시련들로 인해 마지막 남은 큰아들과 함께 힘든 생활을 지내왔었다고 전해집니다.

2012년경 밝힌 그의 근황은 암담했습니다. 이박사의 큰 아들은 공황장애 등으로 7년째 방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무대 체질인 아버지와 달리 많은 사람이 모인 공간에서는 호흡곤란 등의 고통을 느낀다고 말해 주변의 눈물을 자아내기도 했죠.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뽕짝의 길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의 논란이 일게 됩니다. 한 오디션 방송에 참가자 자격으로 출연한 이박사를 향해 당시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여했던 태진아가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던 것인데요.

이박사가 참가자 자격으로 무대를 펼치자 태진아는 짜증이 가득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장르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아티스트로서 그다지 좋게 볼 수는 없는 태도라고 많은 누리꾼들은 태진아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옆에 있던 설운도가 이박사를 좋게 봐주고 싶어도 눈치가 보여 주저할 정도라고 많은 이들이 그 모습을 포착했습니다. 태진아는 “이박사가 전통 트로트 가수가 아니며 그저 광대에 불과하다”라는 실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태진아도 무명시절 뽕짝 앨범을 발매한 적 있어 네티즌들의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게다가 이 박사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자 “한국의 전통 트로트를 보여주겠다”라며 일본으로 진출했지만 추운 겨울날 사인회에 단 2명만 오는 굴욕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과거로 인해 대부분의 네티즌들이 태진아를 “전통 트로트로 이박사만큼 성공하지 못하니까 시기해 질투하는 거다”라고 태진아를 비난했습니다.

이 박사는 다사다난했던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이젠 흘러가는 대로 가려고요.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더라고요. 자연스럽게 내 음악을 열심히 하다 보면 결과도 뒤 따를 거라고 생각해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다시금 도전을 위해 일어선 그에게 좋은 날들이 함께하길바라며 좋은결실을 맺길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