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 볼차노의 한 음악 경연장 환기구를 통해 검은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는데 알고보니 박쥐였습니다. 박쥐는 당시 피아노 경연에 몰두해 있던 연주자 앞을 30여 분이나 날아다니며 소동을 일으켰는데요.
연주자는 생각지도 않은 박쥐의 방해에도 일말의 미동도 없이 자신의 연주를 끝마쳤고 콩쿠르의 우승 타이틀까지 거머쥐며 큰 화제가 됐습니다.

이 일은 ‘제60회 부조니 콩쿠르’ 결선 2라운드에서 일어난 해프닝이었는데 박쥐가 눈앞을 날아다니는데도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연주를 마무리한 사람은 부조니 콩쿠르의 우승자 한국의 문지영입니다.

‘부조니 콩쿠르’는 이탈리아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페르치오 부조니를 기리기 위해 1949년 창설된 피아노 경연대회입니다.
외르크 데무스, 마르타 아르헤리치 같은 명피아니스트를 배출한 유서 깊은 대회이지만 총 63회의 경연 중 1위 우승자를 배출한 경우는 단 32회밖에 없는 까다로운 콩쿠르로 유명합니다.
아무리 기량이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출전하더라도 대회 우승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우승자를 선정하지 않고 1위 없는 2위를 발표하기 때문인데요.
이렇게 1위 타이틀이 힘들기로 유명한 콩쿠르에서 박쥐까지 등장하는 갑작스러운 상황이 닥치면 어떤 베테랑 연주자라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자신의 기량을 10분 발휘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연주 당시 20살밖에 되지 않던 문지영은 놀라운 집중력과 뛰어난 연주를 선보이며 그 해 부조니 콩쿠르에서 15년 만에 나온 1위 우승자가 됐습니다.
한동안 2위만 존재했던 콩쿠르에서 문지영이 아시아 최초로 우승을 차지한 것으로 당시 연주에 몰입해 있던 그녀는 사실 박쥐를 인식조차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연주 도중에 어느 순간 고개를 들다가 눈앞으로 검은 물체가 휙 지나가는 것을 느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는 거죠.

콩쿠르가 끝난 뒤 이탈리아의 한 원로 피아니스트는 “지영, 이곳에서 박쥐는 길조란다”라며 그녀의 우승을 축하했고 심사위원장 외르크 데무스는 “이 시대에서는 사라졌다 생각했던 음악성의 자연스러움을 그녀에게서 발견했다.”며 극찬합니다.
우승 이후 유럽을 돌며 연주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귀국 인터뷰에서 “이 연주가 콩쿠르라는 생각 1등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아예 지우고 연주합니다. 그저 연주하는 것 후회 없이 연주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지금의 나를 만든 가장 큰 힘은 어머니의 헌신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소감을 밝히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우승 직후 더욱 세계를 놀라게 한 점은 그녀가 힘든 가정 형편 속에서 피아노에 대한 열정 하나로 그 자리까지 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는데요.

그녀의 어릴적 별명은 피아노 없는 피아니스트였는데 가정 형편이 어려워 피아노를 구입할 수 없어서 붙은 별명이었죠.
전남 여수 태생인 그녀는 6살 때 피아노를 시작했는데 유치원 선생님이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고 나도 하고 싶다고 졸라댄 것이 시작이였습니다.
가정 형편이 힘들었지만 6살 딸의 간곡함의 어머니는 어린 지형의 손을 잡고 동네 피아노 교습소에 갔고 그녀는 곧바로 피아노에 빠져들었습니다.

장애를 가진 기초 수급자 부모님은 경제 활동에 한계가 있었고 피아노에 재능을 보이는 딸을 보며 기쁘기보다 걱정이 먼저 앞섰다고 하는데요.
음악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는 얘기를 들었고 뒷바라지를 하는 건 현실적으로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집안 형편을 알지만 피아노가 너무 좋았던 문지영은 교회나 학원을 전전하며 하루 8시간씩 연습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기초수급자 부모님이 어렵게 보내준 피아노 학원만으로도 감사함을 느꼈던 거죠. 집에 와서는 종이에 건반을 그려 두드리며 상상만으로 엄청난 연습을 이어갑니다.
종이 건반을 두드리며 연주 소리를 상상하더라도 가난을 향한 그 어떤 원망도 없었습니다.이런 노력 끝에 그녀는 점차 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후에 인터뷰를 통해 “초등학교 2학년 때 엄마가 생일 선물로 가정용 피아노를 사주셨어요. 저희 집 형편에 맞지 않는 300만 원이란 거금을 주고 산 새 피아노였죠.”
“그래서 저한테 피아노 없는 피아니스트라는 말은 지나쳐요.”라면서 부모님의 헌신을 잊지 않는 속 깊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문지영은 11살에 출전한 선화 음악 콩쿠르에서 대상을 타면서 선화예중 수석 입학 기회를 얻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예중 입학을 포기했는데요.
이후 중학교 1학년에 학교를 그만두고 고등학교 졸업 나이까지 홈스쿨을 하면서 하루에 10시간 이상 피아노에만 매달려서 살았습니다.
손가락이 부르트고 손목이 마비될 정도의 고통에도 연습을 멈추지 않았죠.

그렇게 피나는 연습을 한 결과 2009년 현대차 아트드림 콩쿠르에서 대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폴란드 루빈스타인 청소년 국제 콩쿠르 공동 1위’ ‘2012년 독일 에틀링겐 국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에서도 1위’를 차지하면서 그녀의 천재성은 세상에 드러나는데요.
이후 문지영은 검정고시를 치르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합니다. 한 달에도 몇 차례씩 전남 여수에서 서울까지 불편한 다리로 목발을 짓고 자신과 함께 왕복했던 어머니의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그녀의 천재성과 피아노에 대한 열정을 알아본 기업에서도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습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한국메세나협회를 통해 2009년부터 5년간 그녀에게 장학금을 지원했습니다.

또한 부영그룹은 그녀에게 거주할 집을 지원해줬죠. 한국예술종합대학에 입학한 후 문지영은 주요 국제 무대를 휩쓸기 시작했습니다.
2014년 일본 다카마스 국제 피아노 콩쿠르와 스위스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1위를 하고 부조니 콩쿠르에서 정점을 찍었죠. 제네바 콩쿠르 또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피아노 부문 1위를 차지한 건데요.
이제는 전 세계에서 주목받는 음악계의 신성으로 굵직한 국제 무대에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된 문지영은 피아노 여제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행보를 닮은 연주자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2019년 10월에는 영국의 권위 있는 공연장인 위그모어홀에서 데뷔 독주회도 가졌는데요. 런던의 비평가 크리스토퍼 엑서워시는 “한국에서 온 신인 피아니스트가 런던을 휩쓸었다”며 “지적이면서도 자유롭고 기품 있는 연주”라고 극찬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그녀의 연주가 요즘 피아니스트들과 다르다고 말합니다.
피아노의 기교나 테크닉에 치중하기보다 작곡가들이 남긴 영혼을 악보에서 읽어내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지 늘 고민한다는 문지영만의 노력의 결실일테죠.
그녀의 스승인 김대진 한예종 음악원장은 “요즘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는 화려하고 자극적이지만 문지영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처음 들었을 땐 인상 깊지 않을 수도 있지만 곧 타고난 음악성으로 놀라게 하는 연주”라고 그녀를 평가합니다.
최근 그녀는 국제 무대 경험을 쌓으며 세계적 음악가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클래식 영재는 부모의 전폭적인 지지와 어려서부터 해외 유학을 할 재력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일 텐데요.
하지만 최근에는 금수저가 아닐 뿐더러 순수 국내파로 대형 국제 콩쿠르에 우승하는 한국인의 이름을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한국인 최초로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해 큰 화제가 된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며 50년이 넘은 보급형 피아노로 연습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프랑스로 유학 가기 전까지는 국내 피아노 학원에서 피아노를 배웠죠. 문지영에 이어 제63회 구조니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한 박재홍 역시 해외 유학 경험이 없는 국내파입니다.

박재홍은 우승과 함께 작곡가 부조니 작품 연주상, 실내학 연주상, 타타로니 재단상, 기량 발전상 등 4개 부문 특별상도 휩쓸면서 대회 5관왕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피아노에서 뿐만 아니라 차이콥스키 콩쿠르 성악 부문 3위를 차지한 바리톤 유한승은 초등학생 때 파바로티의 cd를 듣고 성악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전주예술중고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 후 독일에서 유학을 했는데요. 유한생 또한 부모님의 큰 도움 없이 콩푸르 상금으로 유학비를 마련했습니다.
집안에 돈이 많아야 클래식을 전공할 수 있다는 편견을 깨뜨리고 전 세계 클래식 음악계를 주목시킨 한국의 음악 영재들을 응원하면서 오늘 내용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