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기 기증은 생명 나눔 운동으로 마지막 순간 꺼져가는 생명에게 새 삶을 선물하고 떠나는 장기 기증자들, 이들로 인해 죽음의 문턱에 있는 환자들은 새 희망을 갖습니다.
그런 가운데 연예인 중에도 장기를 기증하고 아름답게 떠난 이들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8년전 7명에게 새 생명을 주고 떠난 배우 석광렬입니다.

어릴 적부터 화가를 꿈꾸다가 점차 크면서 디자이너 쪽을 꿈꾸기도 했고, 고교 시절 서문여자고등학교 앞 햄버거 가게에서 일하다가 군 복무 당시 타고난 운동 실력을 밑바탕 삼아 스케이트 선수로 뛰었었습니다.
1988년경에는 kbs 무용단 ‘짝꿍들’ 1기 출신인 친구 누나의 권유로 모 광고 기획사에 들어가 청바지 카탈로그 모델로 모델계에 입문하여 100여 편의 광고에 출연했습니다.
특히 1992년에 세계 물산의 아웃도어 브랜드 ‘옴파로스’의 cf에 나와 대중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으며 인터뷰에 따르면 피아노 실력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촬영 보름 전부터 피나는 연습으로 익혀가며 대역을 쓰지 않은 채 직접 쳤다고 합니다.
이 광고로 석광렬은 소녀 팬들의 마음을 한순간에 사로잡았고 cf 모델에서 배우가 되는 발판을 마련했는데 그는 이종원, 이정재 등처럼 모델 출신으로 연기 생활을 시작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1993년 남기남 감독의 영화 ‘소녀 18세’를 시초로 연예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인 뒤 kbs ‘토요대행진’ 코너 ‘진실과 대답’에서도 활약하다가 1993년 kbs 드라마 ‘금요일의 여인’에 캐스팅되면서 배우로 정식 입문합니다.
이후 1994년 ‘한쪽 눈을 감아요’, ‘남자는 외로워’에 연이어 출연하면서 당시 주목받는 신인 연기자로서 연기력과 훈훈한 외모로 드라마 팬들과 소녀 팬들의 인기를 한창 얻어가던 그야말로 앞날이 창창한 배우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tv는 사랑을 싣고’의 첫 번째 출연자이기도 한 그는 한창 잘 나갈 때 그의 날개가 부러지고 맙니다. 1994년 7월 25일 새벽 ‘한쪽 눈을 감아요’의 야간 촬영을 마친 석광렬은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현대 스텔라 중고차를 몰고 다니다 사고 5개월 전 마련한 새 차였고, 융자금 1천만 원과 할부금 800만 원이 남아 있었다고 하죠.
잠실 올림픽 대로를 지나가다 그만 한강 교각을 들이받고 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크게 다친 석광렬은 잠실중앙병원 응급실로 이송됐으나 의식불명에 빠졌습니다.
사고 6일째인 31일에는 뇌사 판정을 받게 되는데 하나뿐인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슬픔 속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평소 했던 내가 세상을 떠난다면 꼭 장기 기증을 하고 싶다는 말을 떠올리고 그 뜻을 지켜주기로 결심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언론 인터뷰에서 “광렬이 영혼은 부모 곁에 있을 겁니다. 광렬이의 몸은 여러분들한테 힘을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8월 1일 이른 아침부터 수술이 시작됐고 의료진은 심장, 간, 췌장, 신장 2개, 안구 2개를 적출했고 이어 불치병 환자들에게 이식 수술이 곧바로 이뤄졌습니다.
수술은 곧 아버지에게 아들을 떠나보내는 고통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의식은 없지만 영혼은 살아있었을 석광렬은 그 값진 희생으로 고통을 달랬습니다.

모두 7명에게 새 생명을 주고 27세에 하늘의 별이 된 석광렬, 한창 총망받던 연기자였던 그는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았고 장기 기증 대한 사회적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후에 많은 연예인들이 장기 기증에 서약했습니다. 그 해 열린 한국방송대상 시상식에서 석광렬은 특별상을 받았는데요.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대신한 수상 소감에서 “광렬이를 오래 기억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떠나기 1년 전에 한강 영화 촬영 헬기 추락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변영훈과 더불어 창창한 앞날을 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다 2022년 3월 석광열의 부친이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서 무연고자로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보도됩니다. 아들인 석광열이 유일한 자식인 데다 먼저 떠났기에 홀로 쓸쓸한 말년을 보낸 채 생명을 다한 것이었습니다.
무연고자인 걸로 보아 모친 또한 이미 유명을 달리한 것으로 추측되었고 그처럼 이후 새 생명을 안겨주고 떠난 이들은 더 있었습니다.

그룹 코리아나의 멤버였던 홍화자의 친정 5촌 조카이며 가수 홍성민의 6촌 동생인 가수 홍종명 또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1986년 언더그라운드 라이브 클럽에서 록 음악 가수로 데뷔했고 이후에도 많은 작품의 ost 가수로 활동했습니다. 2009년 도쿄에서 열린 한류스타 갈라 콘서트도 참여했는데요.
그러다 홍종명은 2012년 12월 19일 뇌출혈로 쓰러집니다. 과거 뇌졸중으로 세 차례 수술을 받았던 그는 끝내 의식을 찾지 못했고 28일 뇌사 판정을 받았습니다.
가족은 장기 기증을 결정했고 장기를 적출해 8명에게 새 생명을 안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선택으로 세상을 떠난 배우 김성민도 새 생명을 전하고 떠났습니다.

김성민은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지만 안타깝게도 2007년부터 불법약물에 빠져들었습니다. 2015년 3월 집행유예 기간 중 또다시 투약 혐의로 구속되면서 팬들에게 큰 실망을 안겼고 실형을 피해가지 못하고 10개월을 복역했습니다.
그러다 2016년 2월 24일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야 말았는데 발견 직후 서울 성모병원으로 후송돼 심폐소생술을 받았으나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습니다.
뇌사 판정을 받자 가족은 평소 그의 뜻에 따라 의료진의 장기 기증 의사를 밝혔고 각막, 신장, 간을 기증해서 5명에게 새 생명을 주고 떠났습니다.
장기 기증의 뜻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연예인들도 있었습니다. 1995년 2월 ‘사랑과 우정 사이’로 유명한 그룹 ‘피노키오’의 리더 김의찬이 과로 상태에서 급체로 질식해 뇌사 상태에 빠졌습니다.
가족은 장기 기증을 결정하고 병원에 이런 뜻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과다한 약물 투여로 장기를 이식할 수 없다는 병원 측의 판단에 따라 장기 기증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2007년 2월 사망한 정다빈는 생전 경기도의 한 장애우 재활시설에 정기적으로 후원금을 지원하고 봉사활동을 하는 등 선행을 이어왔으며 사후 각막 기증과 뇌사시 장기 기증도 서약했지만 사후 4시간 이내에 각막이 기증돼야 하는데 소식이 늦게 알려져 장기 기증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른 나이에 떠났지만 마지막까지 쉽지 않은 결정을 하고 떠난 그들이 부디 그곳에서는 아픔 없이 편히 쉬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