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드라마에서 감초 역할로 때로는 카리스마 있는 역할로 우리에게 친숙한 전설적인 밴드 ‘산울림’의 김창완 그가 인생에서 너무나 불행한 사건을 겪으며 사지가 절단되는 기분이라는 말을해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어릴 적 경기도 김포 시골 마을의 미8군 군속 설계사 집 안에서 자랐던 김창완은 아버지가 엄하고 무서웠던 데다가 어머니와 금실도 좋지 않아 집안 분위기가 항상 무거웠다고 하는대요.

거기에 아버지가 퇴직금을 전부 영화에 투자했다가 실패까지 하는 바람에 집안의 형편이 상당히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런 김창완과 당시 김포 벌판에서 함께 놀던 친구들은 그보다 두 살씩이 많았는데 어느날 동네 친구들은 학교에 입학했고 어린 김창완은 무작정 학교로 그들을 찾아가 함께 수업을 들었는대요.
그렇게 1년간 초등학교를 청강하자 결국 교장 선생님은 자신의 재량으로 정식 학생으로 인정을 해, 김창완은 54년생으로 52년생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게 되는데대요.
그는 이후 중2때는 하교길에 만나는 사람마다 “왜 사세요?”라고 묻는 평범하지 않은 행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고2때는 창덕궁에 사생대회를 갔는데 빈둥빈둥 놀다가 그림 제출할 시간이 되자 도시락에 남은 밥풀을 도화지에 문질러 놓고 그 위에 낙엽을 확 뿌린 뒤 발로 밟아서 제출하는 비범한 행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목은 ‘가을’이었던 그 작품으로 당시 김창완은 학교에서 생각지도 않게 상까지 받았다고 하는데요. 그는 고등학교 때 막연히 미래나 음대를 가고 싶었지만 실기 시험이 있다는 걸 뒤늦게야 알게 되어 재수를 생각했다가 담임 선생님이 서울대에 원서를 넣은 것이 붙게 되어 얼떨결에 서울대에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는 학교들 사이에 서울대 진학 경쟁이 심했는데 서울대에서도 인기가 높은 과가 있고 문턱이 낮은 과가 있었지만 무슨 과를 들어가든 다 서울대를 합격시켰다고 할 수 있었기에 선생님은 비인기과에 원서를 넣었던 것이었는데요.
김창완은 처음에 잠사학과에 붙었다는 소식을 듣고 잠수를 배우는 과인 줄 알고 잠수복을 사러 남대문 시장에 가려고 했을 정도로 뭘 배우는 과인지도 몰랐다가 알고 봤더니 누에와 섬유를 배우는 학과라서 실망을 하게 되는대요.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그때 농대생들은 뻔하다와 빤하다로 분류됐어요. 농대 졸업생들이 보통 가는 직장을 가면 앞날이 뻔하다고 했고 방송사나 은행 같은 다른 쪽으로 진출하면 잘 안될게 뻔하다는 뜻이었죠.”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김창완은 과거부터 집안 형편도 안 좋았는데 이후 아버지가 건강까지 악화되시며 무려 28년이나 몸져 누우시게 되다보니 그런 집안형편상 사립대에 가기는 어려워 그냥 붙었으니까 다닌다는 심정으로 그렇게 잠사학과를 다니게 되는데요.
열일곱의 이른 나이로 대학에 들어가 도화지에 빨강, 파랑, 노랑, 원색으로 그림을 그려 온 벽에 도배를 해놓기도 했고 후에 대학 졸업을 앞두고는 방에서 바리깡으로 머리를 싹 밀어버리고 졸업식 때는 가발을 쓰는 등 뭔가 특이한 행동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러다 대학교 1학년 당시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집에 5천원짜리 기타를 뜬금없이 사가지고 오게 되는데요. “저거 한번 사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며 궁금했던 그는 큰 기대까지는 하지 않고 그저 기타 교본을 보고 연습을 하면서 정식 작곡이라기보다 그저 흉내를 내가면서 한 달 만에 ‘왜 가’라는 곡을 쓰게 됩니다.

당시 그렇게 기타를 연습했던 그가 후의 대한민국 락 음악의 전설 ‘산울림’이 되리라고는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요.
김창완에게는 동생 김창훈과 김창익이 있었는데 기타를 치던 형을 어깨 너머로 지켜보던 둘째 김창훈이 자신도 기타를 사서 형과 합류하게 되었고 막내 김창익은 전화번호부와 노트 등을 방바닥에 늘어놓고 숟가락으로 두드리며 리듬을 타다 나중에 드럼을 치기 시작하며 형제 밴드 ‘산울림’의 역사가 시작되게 됩니다.
당시 김창완 삼형제는 방에 계란판을 붙여 방음실로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악기와 앰프에서 터져 나온 소음 때문에 시끄러워 못 살겠다는 이웃들의 항의가 끊이지 않아 어머니가 날이면 날마다 대신 이웃들에게 사정하며 살았다는데요.

동네 음악 학원조차 다닌 적 없던 형제는 대학 시절, 아마추어 정신으로 무장한 채 주말마다 모여 연습을 했고 번안곡이 유행하던 당시 다른 대학 밴드들이 외국의 유명 곡들을 카피하는 수준에 머물렀을 때 김창완은 ‘아니 벌써’ 등 후에 산울림의 전설적인 히트곡이 될 노래들을 100곡이나 만들어, 자작곡만으로 미8군 무대로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이후 삼형제는 ‘무이’라는 팀명으로 제1회 대학가요제에 출전해 예선에서 1위를 차지하게 되는데요. 당시 예선 2위는 역시 나중에 유명 그룹이 된 ‘샌드페블즈’였습니다.
당시 둘째 김창훈는 원래 ‘샌드페블즈 5기’ 멤버로 있었다가 6기에게 바톤을 터치하고 ‘무이’로 들어오게 된 것이었고 샌드페블즈는 김창훈으로부터 받은 곡인 ‘나어떡해’로 예선 2위를 했다가 후에 무이의 김창완이 이미 졸업생 신분이었던 바람에 본선 참가를 거부당하자 어부지리 격으로 본선에서 대상까지 수상하게 됩니다.
이후 이 사연이 알려지면서 삼형제에게는 음반 기획사로부터 앨범 제작 제안이 들어오게 되는데요. 김창완이 취미로 만들어 놓은 곡이 100여 곡이나 있었던 데다가 동생들이 학업에 전념하기로 하면서 삼형제는 그동안 작곡해뒀던 곡이 아까워 정리하는 기분으로 기념용 음반을 만들기로 했고 음반사 사장은 그들에게 ‘산울림’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게 됩니다.
이때 취입한 앨범이 바로 ‘산울림’의 1집, ‘아니 벌써’였는데요. 지금 내놓아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센스로 무장되어 있었던 독보적인 매력을 자랑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노래들이 이내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음반 하나 갖고 싶다는 생각으로 취미 삼아 만들었던 곡들이 의외의 좋은 반응을 얻게 되자 김창완은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준비 중이던 은행 입사 시험을 포기하고 본격적인 산울림 활동에 돌입하게 됩니다.
1집의 대표 곡이었던 ‘아니 벌써’는 황당한 느낌이 들 정도로 유머러스한 가사에 경쾌한 멜로디로 당시 주류 음악 시장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게 되는데요.
대중들은 한마디로 골 때리는 음악이 나왔다며 산울림 돌풍에 휩싸이게 되었고 1집 앨범이 20일 만에 무려 40만 장이나 팔리며 데뷔 1년 만에 문화체육관에서 첫 단독 콘서트까지 열게 되는데 공연 당일에는 관객들이 새벽부터 장사진을 쳤습니다.

또한 같은 해 TBC 가요대상에서는 중천부문상을 수상하며 메이저 음악 시상까지 평정하는 기염을 토했고 1977년생 아이는 ‘산울림둥이’로도 불려졌을 정도로 당시 산울림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는데요.
1집의 성공으로 산울림은 이미 만들어 놓은 곡이 워낙에 많았기에 이후 2집, 3집 등등 정교 음반을 줄줄이 발표했고 ‘개구쟁이’ ‘꼬마야’ ‘어머니와 고등어’ ‘산할아버지’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기며 한국 악밴드의 전설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김창완은 당시의 인기에 대해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가공을 거치지 않은 순수한 형태로 대중에게 접근했고 이것이 좋은 반응을 얻은 게 아니었을까라고 평가했는데요.
또한 폭발적이었던 인기와는 달리 당시 김창완 형제는 돈은 전혀 벌지 못했다는대요. 앨범을 40만 장이나 팔았지만 당시는 저작권이 확립돼 있지 않았고 레코드사와 가수는 계약서도 쓰지 않았던 시절이라 당시는 돈을 주면 받고 안 주면 막았던 그런 시절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한번은 지방에서 공연을 했는데 개런티를 몇 푼 주는 걸 그때는 숙맥이어서 감히 받지 못하고 서울 올라가서 주십시오라고 했다가, 나중에 서울에 와서 달라고 했지만 그때 가니 돈을 주지 않아 받지 못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어리숙하고 순진했던 김창완이었지만 당시 그에게도 어느 날 사랑이 찾아오게 되는대요. 그는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아내 강귀빈 씨와 어릴 적 졸업 이후 쭉 보지 못했다가 대학생이 되어 독서 모임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되는데요.
김창완은 2년 일찍 학교를 들어가 두 살 연상이었던 그녀를 다시 만난 당시를 회상하며 “당시 초록색 파카에 긴 생머리를 한 그녀의 뒷모습에 한눈에 반에서 데이트 거리를 만들기 위해 책을 빌리곤 했어요. 의대생인 그녀가 빌려준 책은 주로 해부학과 같은 의학 서적이었죠.”,

“결국 독서용 보다는 취침용 베개로 이용되었지만 이 책을 계기로 5년의 연애를 하고 결혼하게 되었죠.”라며 서울대 의대생이자 이후 소아과 전문의가 되게 되는 그녀와 결혼까지 골인 나게 되었고 후에 외동 아들을 낳게 됩니다.
김창완의 아들은 부모의 유전자를 받아 굉장히 똑똑해서 후회 세계적인 기업인 구글에 들어갔고 또한 김창완의 동생 김창훈과 김창익도 각각 서울대와 고려대를 나왔을 정도로 핏줄이 엘리트 혈통이었는데요.
동생 김창훈은 이후 CJ푸드에 들어가 미국 지사에서 거의 정년까지 중역으로 재직했고, 김창익은 대우자동차에 근무하다 IMF 이후 가족들과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을 떠나 식품 유통회사의 이사로 지내게 됩니다.
그 사이에 김창완은 조금씩 하곤 했던 배우 생활이 완전히 자리가 잡혀 어지간한 탤런트들보다 더 많은 드라마에 출연하는 베테랑 연기자가 되었고 또한 40년 넘게 하루도 빠짐없이 라디오 디제이로도 활동하며 그야말로 연예계에서 천재적 재능으로 영역을 넘나들며 종횡무진하게 되는데요.

하지만 그러던 김창완에게 어느날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비보가 전해지게 되는데 바로 막내였던 김창익이 눈이 많이 왔던 어느 날, 직원들이 위험할까 봐 본인이 직접 지게 차를 몰다가 경사길에 미끄러지는 사고를 당하게 되었고 곧바로 인근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출혈이 심해 결국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당하게 됩니다.
형 김창완은 그 일로 너무 큰 충격을 받아 그날 이후 세상에 컬러가 싹 빠진 흑백으로 바뀐 듯한 느낌이라며 정신이 비관적으로 변했다고 말했는데요.
자신이 꼭 가고 싶은 세상이 있다면 동생의 사망일 이전 어느 하루만이라도 돌아가고 싶다며 막내가 있는 세상과 없는 세상이 그토록 다르며 사지가 절단된 기분이라면 딱 맞을 것이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 일이 있은 뒤로 김창완은 생각이 비판적이 되어 삶은 그저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과도 같고 사람의 인생은 생각해서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도 말했는데요.
결국 그는 이후 원래는 20년 뒤에나 하려고 했던 산울림 정리 작업을 갑자기 시작하게 됐고 이후 더 이상은 산울림이라는 이름으로는 음악 활동을 할 수가 없게 되었기에 김창완 밴드를 새로 결성해 음악 활동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김창완은 현재 그런 아픔들을 딛고 음악과 연기 활동에 매진 중이고 거기에 매일 아침 sbs 라디오 ‘아름다운 이아침 김창완입니다’를 20년 넘게 장수 프로로 진행하고 있는대요.
또한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성금 500만 원을 기부하는 등 나보다 더 힘겨운 우리 이웃을 생각하는 누구보다 큰 마음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과거 계약서도 없었고 검열도 통과해야 하는 좁은 길을 뚫고 나온 것이 산울림의 음악이었지만 그 음악들은 지금의 상업주의가 만들어낸 음악보다 폭이 훨씬 넓었고 현재까지 40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불리워질 정도록 대단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데요.

음악이면 음악, 연기면 연기 탁월한 재능으로 다방면에 걸쳐 수십 년을 활동하며 이제 70대로 접어든 그가 앞으로도 자신의 음악들처럼 강한 생명력으로 오래도록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되기를 바라며 늘 변함없는 모습으로 활동해온 배우 겸 가수 김창완에게 여러분의 따뜻한 한마디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