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돈아니야??” 쓰레기 수거 작업 중 ‘돈다발’을 발견한 환경미화원, 잠시 후 그가 내린 결정에..

강원도 태백시의 환경미화원들이 폐기물 수거 작업 중 515만원의 현금을 발견한 뒤 이를 주인에게 반환하는 선행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태백시 안정호 주무관과 김해수, 양훈규 환경미화원은 장성동의 한 아파트에서 대형 폐기물을 수거하다가 현금 515만원이 든 봉투를 발견했는대요. 발견 즉시 이들은 대형 폐기물 신고 대장을 통해 폐기물을 배출한 A씨에게 연락하여 분실 여부를 확인하였고, 이후 현금을 태백 경찰서에 맡겨 분실자와 연락했습니다. A씨는 연락을 받고 태백 경찰서로 달려와 자신의 돈임을 확인했으며, “자녀에게 받은 용돈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밝혔는대요. A씨는 환경미화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현금이 들어있던 쌀통이 폐기물로 처리된 이유는 A씨의 자녀들이 어머니의 집을 새롭게 꾸미기 위해 가구 등을 교체하다가 함께 버렸던 것으로 알려졌는대요. 환경미화원들은 “누구나 이렇게 행동했을 것”이라며 “앞으로도 시민을 위한 청소 업무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태백시는 이들에게 시장 표창을 수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합니다.

“뭐하러 그런걸 사와!!” 주폭이 심한 아버지에게 도망쳐나온 어머니와 저는 달동네에서 힘겹게 살았고 성인이 되서 집으로 가져간 피자 한판에 어머니는 그만..

저는 아주 깊은 산 속 깡촌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하루에 버스 한번 볼까말까한 시골중에서도 시골이였죠.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손바닥만한 작은 밭과 점점 낡아가는 한 칸짜리 집. 그 작은 밭에서는 가족들이 배부를 만큼의 곡식을 재배하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한량처럼 지내셨습니다. 그저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일만 하셨고 낮에는 주저앉아 술에 취하며 살고 겨울에는 도박장을 돌며 다니며 화가 나면 엄마를 이유 없이 때리는 것이 일상이었죠. 몇 년이 지난 어느날 어머니는 “더 이상 이렇게는 살 수 없다”며 저를 데리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서울에 위치한 달동네가 두번째 제 보금자리였습니다. 집들이 서로 붙어있는 산 동네에서 작은 원룸 하나를 얻어 어머니와 단둘이 살게 됐죠. 어머니는 서울에 올라온뒤 쉴 틈없이 몸 사리지 않고 일을 하셨습니다. 공예품 부업을 하면서 가게 납품을 하셨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라면은 커녕, 밥 반공기에 장아찌를 먹으며 살았는대요. 초등학교를 가려면 아파트를 지나가야 했던 저는 아파트 상가에 있는 피자집이 매일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저는 “냄새죽이네, 한번만 먹어봤으면 소원이없겠다”라고 매일 앵무새처럼 말하며 그 길을 지나갔습니다. 그 당시에 피자는 부자들만 먹는거라고 생각했죠.. 그러던 어느날 피자집 전단지가 우리 집앞에 굴러다니는걸 보고 도저히 참을 수 없던 저는 어머니에게 “엄마 우리도 피자 한 개만 먹으면 안돼?”라고 물었죠. 엄마는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전단지에 눈길을 보내셨습니다. 제가 하도 졸라되니 엄마는 “얼마니?”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전단지를 들여다보니 무슨맛, 무슨맛이라 잔뜩 쓰여 있지만.. 맛 보다는 가격이 먼저 였던 저는 전단지 맨 밑 끝에 있던 치즈피자를 보고 9900원이라며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는 지갑에서 지폐랑 동전을 보태 9900원이라며 손에 쥐어 주셨고 그렇게 난생 처음 피자라는 것을 먹게 되었습니다. “와! 환상적인 맛이야. 말로 표현이 안돼”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피자, 제가 피자를 너무 좋아하니까 그날 이후 어머니는 피자값으로 동전을 따로 모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살면서도 세월은 흘러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도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피자를 좋아했던 어린시절의 저는 서서히 잊혀지고 있었죠. … Read more

“할머니! 도망가세요!!” 들개무리에게 물려 끌려가는 할머니를 본 강아지는 즉시 달려들었고.. 얼마 후 전해진 소식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최근 할머니를 위협하던 마을의 들개를 막기 위해 희생한 용감한 강아지의 사연이 전해져 이슈가 되고 있는대요.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전통주 마시는 개 근황”이라는 글이 게시되었습니다. 이 강아지는 주인이 증류를 만들기 위해 보자기에 거른 막걸리를 먹고 취해서 헤롱헤롱 거리는 모습이 커뮤니티에 올라와 화제가 됐습니다. 글쓴이 A씨는 부상을 입은 치료 중인 강아지의 사진을 함께 게시하며, “들개들이 동네 고라니를 다 잡아먹어 더 이상 먹을 게 없어서 동네 할머니를 … Read more

“노년에 주책도 아니고 뭐하시는거지?” 변두리 골목에 위치한 만두가게를 주기적으로 찾아와 데이트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얼마 후 모습을 감춘뒤 다시 찾아온 할아버지는..

변두리에 위치해 와이프와 함께 운영하는 작은 만두가게, 매주 수요일 오후3시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보통 할아버지가 먼저 와서 기다리지만 비가 온다거나 눈이 온다거나 날씨가 궂은 날이면 할머니가 먼저 와서 구석 자리에 앉아 출입문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할아버지를 기다렸는대요. 두 노인은 별말 없이 서로를 마주 보다가 생각난 듯 상대방에게 황급히 만두를 권하다가 눈이 마주치면 슬픈 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눈물을 고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만두를 빚고 있는 아내에게 물어봤죠. “대체 저 두 분은 어떤 사이일까?” “글쎄요..?” “부부 아닐까?” “부부가 뭐 때문에 변두리 만두 가게에서 몰래 만나요” “허긴 부부라면 저렇게 애절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진 않겠지.” “무슨 뜻이에요?” “안방 장롱처럼 고개만 돌리면 볼 수 있는게 아내고 남편인데 뭐가 애틋할 게 있겠어?” 그저 내 남편 이구나하며 사는 거지.” “뭐예요? 그럼 사랑으로 사는게 아니라는 말이예요??” 아내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나는 ‘아차’ 했습니다. 아내의 기분을 거슬러 봐야 내게 득 될 것이 없다는 걸 일찍이 터득한 저는 재빨리 말을 돌렸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내 가슴은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 늘 섭씨 99도로 끓고 있다구.” 아내는 눈을 흘겼지만 싫지 않은 기색이었죠. “저 두 분은 어떤 사이일까?” 저는 다시 할아버지와 할머니한테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혹시 첫 사랑이 아닐까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서로 열렬히 사랑했는데 주위의 반대에 부딪혀 본의 아니게 헤어졌다. 그런데 몇십 년만에 우연히 만났다. 서로에게 가는 마음은 옛날 그대로인데 서로 가정이 있으니 어쩌겠는가..?” “그래서 이런 식으로 재회를 한단 말이지? 아주 소설을 써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아내의 상상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서로를 걱정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따뜻한 눈빛이 두 노인이 아주 특별한 관계라는 걸 내심 알 수 있었죠. “근데, 저 할머니 어디 편찮으신 거 아니에요? 안색이 지난번 보다 아주 못하신데요.” 아내 역시 두 노인한테 쏠리는 관심이 어쩔 수 없는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따라 할머니는 눈물을 자주 찍어내며 어깨를 들먹거렸습니다. 두 노인은 만두를 그대로 놓은 채 자리에서 … Read more

“나는 지금 너무나 행복하단다”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엄마를 위해 병원에서 짧은 결혼식을 올린 한 딸, 엄마가 돌아가신 후 정식 결혼식 도중 도착한 하나의 영상편지엔..

일본 히로시마 현에서 열린 한 결혼식. 축복의 시간이지만 그 자리에는 함께 기쁨을 누리지 못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신부의 어머니인 이즈미씨였습니다. 1년 전, 이즈미씨는 암 진단과 함께 시한부로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딸인 노조미씨는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 곁을 지켜주었습니다. 노조미씨는 열심히 어머니를 돌봤지만 이즈미씨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당시 노조미씨의 약혼자였던 아츠시씨는 힘들어하는 연인을 지켜보며 자신도 직장을 그만두고 함께 어머니를 돌보기로 결심하는대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츠시씨는 결심을 굳히게 됩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둘이 행복하게 결혼하는것을 보여주겠다는것이었죠. 그렇게 노조미씨에게 청혼을 합니다.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했지만 그로부터 불과 몇 주 뒤, 이즈미 씨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고 안타깝게도 그해 여름을 지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소식과 함께 결국 병원에 장기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막 결혼식장을 알아보기 시작했던 두 사람은 이즈미씨의 상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결혼식을 포기하려 했지만 한가지 희망적인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즈미씨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작게나마 결혼식을 진행했던 사례가 있었던 것이죠.  “병실에서 결혼식을 할 수 있을까요..?” 이 한마디로 시작된 서프라이즈, 두 사람은 바로 병원에 상담을 요청했고 병원 측에서는 그들의 마음에 공감하며 흔쾌히 도움을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앞으로 진행될 모든 준비는 어머니 이즈미씨에게는 비밀인채로 말이죠.  그리고 약속한 당일날, 담당 간호사는 이즈미씨에게 날씨가 좋으니 산책을 가자고 제안했고 그렇게 병실이 비워진 사이 두 사람은 작은 결혼식을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산책에서 돌아온 이즈미 씨는 두 사람의 깜짝 선물에 놀라고 맙니다. 우중충했던 병실은 화사하게 꾸며져 있었고 그곳엔 웨딩드레스를 입은 딸과 턱시도 차림의 예비 사위가 이즈미씨를 맞이했죠. 근사한 서프라이즈에 그녀는 결국 눈물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신랑 신부 두 사람은 이 특별한 결혼식이 엄마의 기억 한편에 오래 남을 수 있도록 10분간의  예식을 진행했습니다. 어머니 이즈미씨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추억을 마음 깊이 새길 수 있었죠. 한달 뒤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새겨진 그 병실에서 이즈미씨는 마지막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로부터 2개월 후, 두 사람은 어머니의 이름이 쓰여진 결혼증명서를 손에 안고 하객들을 초대한 정식 결혼식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노조미씨는 어머니가 이 모든 것을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을 거란 생각에 … Read more

“이대로 한 줌의 재가 되는것을 보는건..” 2년이라는 긴 투병 끝에 찾아 온 뇌사 판정, 5살 천사 소율이는 3명에게 새 생명을 선물하고 우리의 곁을 떠났습니다

한 아이가 오늘도 놀이터에서 지칠 줄 모르고 2시간 이상 놀고 있습니다. 이 건강하고 웃음이 아름다운 아이는 2019년에 물에 빠지는 사고를 당하게 됐습니다. 아이의 아빠는 아이가 금방일어나 털어날 것으로 생각했지만 아이는 2년이라는 오랜 투병 끝에 뇌사 판정을 받게 됐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소율, 소율이는 아기가 생기지 않았던 부모님이 3년이라는 기다림 속에 기적처럼 찾아 온 귀하고 소중한 딸입니다. 소율이는 웃음이 참 많은 아이였고 언제나 아빠, 엄마를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이가 웃을 때마다 부모는 온 세상을 가진것 같았죠. 명랑한 소율이는 작은별 동요에 맞춰 춤추며 손을 흔들기도 했습니다. 기저귀를 찬 엉덩이를 흔들려 춤을 출땐 그렇게 모두가 즐거울수없었죠. 이렇게 행복했던 가족에게 예상치 못한 불운이 찾아왔습니다. 하루 종일 놀아도 지치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소율이가 그만 2019년에 키즈 카페 놀러갔다가 물에 빠지는 사고를 겪게 되었습니다. 심정지를 겪은 후 소율이는 뇌 손상으로 인해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소율이는 2년 동안 힘겨운 병상생활을 하게 됩니다.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에 소율이는 콧줄로 음식을 섭취해야만  했습니다.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일어날 거 같은 … Read more

“제가 너무 간사한걸까요?” 아내가 집을 나간고 애지중지하게 키운 우리 딸래미, 성인이 되자 제 또래의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고 찾아왔고 전 눈이 뒤집혀버렸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혼하고 나서 홀로 딸아이를 키우고 있는 60대 남성입니다. 아주 예전에 우리 아이가 좀 어렸을 때 와이프와 자주 다퉜습니다. 끝내 대화로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관계는 더 악화되어 와이프는 무작정 캐리어를 들고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그때 저 혼자 아이를 키워야 했기 때문에 막막하기만 하고 어떻게 가정을 꾸려나가야 할지 걱정이 태산이었죠. 그때 제 딸은 초딩학생이었는데 아이는 엄마가 더 이상 우리 앞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듯 엄마를 내내 기다렸는데 참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딸이기도 하고 혼자서는 도무지 키울 엄두가 나지 않아서 친척집이라도 맡겨야하나 하루하루를 고민중이였죠.. 그런데 그런 저의 고민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어느날부터 딸이 아침밥을 해놓기 시작했습니다.  “아빠~ 반찬 입맛에 안 맞으면 언제든 말해줘. 내가 다시 해줄게”라며 말하는데 저는 딸이 안쓰러워서 꼭 안아주고야 말았습니다. 딸은 아빠가 엄마처럼 자기를 등지기라도할까봐 겁이 났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딸이 너무 안타까워 딸을 다른 곳으로 보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딸은 속한 번 썩이지 않고 무럭무럭 잘 자라주었습니다. 딸은 공부도 잘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장학금을 타고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 딸은 저의 자랑이었고 저의 전부였지요. 하지만 그렇게 착하고 예쁘기만 했던 딸이 대학교에 들어간 지 몇 달 만에 변하기 시작했어요. 제일 달라진 건 귀가 시간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초저녁에 들어오던 딸이었는데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밤 10시가 되어도 들어오지 않았던 겁니다. 게다가 사춘기 때도 안하던 반항이랑 말대꾸까지 제 앞에서 하더라고요. 저는 속상해서 딸을 타일렀을 뿐인데 딸에게는 그 마음이 보이질 않았나 봅니다.  “지희야. 너 요즘 왜 그러냐? 어? 대체 지금이 몇 시인데. 아빠한테 연락도 안 주고 그렇다고 연락도 안 받고 지금까지 뭐 하고 다닌건데… 아빠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어제도 동아리 애들이랑 스터디하다가 온 거예요. 다른 애들은 다 놀러 가는데 것도 아빠 걱정할까 봐 저만 빠져나왔다고요!” “아니 무슨 스터디를 그 밤늦은 시간에 해? 아빠는 그 스터디한다는 말도 솔직히 믿기가 어렵구나.. 이렇게 연락도 없이 매번 아빠 실망시키면 걱정하고 참견할 수밖에 없다” 원래는 차분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았습니다. 말하다 보니 저는 저대로 화나서 언성이 높아지고 말았죠. 딸은 딸대로 기분이 상했던지 한숨을 푹푹 쉬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딸과의 잦은 다툼이 계속되던 어느 날, 그날도 제가 아침에 딸이 나갈 때 꼭 통금시간 지켜달라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밤 10시가 됐는데도 딸이 집에 들어오지 않자 저는 집밖으로 나가서 딸을 기다렸습니다. 저는 딸에게 계속 전화를 걸며 주변을 서성거렸는데 딸은 끝까지 제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날은 화가 나기보다는 속상해서 눈물이  차오르더군요. 머릿속에서는 온갖 상상이 들어 아침까지 연락이 안 되면 경찰에라도 신고를 해야겠다고 다짐했죠. 그러다 집에서 딸아이를 한참을 기다리다가 어느순간 깜박 잠이 들었고 그라다 누가 저를 부르는 듯한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저는 정신이 번쩍 들며 황급히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전 입을 다물지 못했는데..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딸과 그 곁에는 어떤 남자가 옆에 있었습니다. 이게 뭔가 싶더라고요.. 제 앞에서 언뜻 보기에 나이가 들어 보였는데 딸은 어쩌자고 아무 예고도 없이 그 사람을 제 앞에 들이밀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이 남자는 누구지? 어떻게 아빠한테 연락 한번 없이 낯선 사람을 데리고 들어와?” 저는 다짜고짜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딸의 돌발행동에 당황하기까지 했었는데 설마.. 만약 내가 생각한 짐작이 제발 아니기만을 바랬죠. 당장이라도 그 남자의 얼굴을 후드려 패고 싶은 시정이었습니다. 제가 큰소리로 그 남자 누구냐고 묻는데도 제 반응에 놀랐는지 그 남자가 딸의 옆으로 바짝 다가와 앉더라고요. 저는 딸이 제 말에 대꾸하지 않자 이번에는 곁에 있던 그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습니다. 한눈에 봐도 나이가 많아 보였는데 자세히 보면 볼수록 제 또래처럼 보였습니다. “당신 누구요? 지금 우리 딸이랑 내 앞에 있는 이유가 뭐죠? 우리딸이랑 무슨 관계입니까?” 그때 딸이 고개를 서서히 들더니 저를 쳐다보고 얘기를 하더군요. “아빠. 저 할 말 있어요. 제 곁에 있는 이 사람..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어제 같이 있었던 사람인데 이미 제 맘을 결정한 이상 하루라도 빨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무턱대고 찾아온 거예요.. 죄송해요..” … Read more

“아빠..울지마..우린 괜찮아..” 부유하진 않더라도 남들처럼 우리 자매를 키우고계셨던 아빠가 공사장에서 크게 다치셔서 몸져누우셨고.. 그때부터 제 삶은..

아빠는 열심히 공사장을 돌며 가난했던 우리 가정을 위해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엄마도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식당에서 일을 하고 계셨는데 어느날 집으로 돌아오던길에 교통사고로 우리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당시 저는 다섯 살이었고, 엄마의 얼굴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후로 아빠는 여덟 살과 다섯 살이라는 어린 딸 둘을 혼자 키워야 했습니다. 우리를 더 잘 키우기 위해 아빠는 쉬는날없이 일을 나가셨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세 식구가 굶어 죽지않을정도였죠. 그렇게 전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짝꿍도 생겼는데 그 아이는 공주처럼 이쁘게 옷을 입고있었습니다. 꽤나 친해지자 저를 집으로 초대했고 그렇게 처음 그 친구의 집을 방문하게 됐는데 친구의 집 안에는 곰팡이가 없었고 신선한 과일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으며 집도 넓어서 큰 장난감들이 많았습니다. 그때, 내가 얼마나 가난한지를 알게 됐죠.. 언니는 가정 형편이 좋지 않기에 빨리 돈을 벌어야한다며 상고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중학교 입학을 앞둔 저는 미래에 대한 꿈이 없었기 때문에 중학교를 졸업하면 언니처럼 되리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학교 수업을 듣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니, 사실 초등학교때 선생님이 내가 가진 재능이 내 인생을 바꿔 줄지도 모른다라는 말씀에 기대감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했고 결과는 전교 1등이었습니다. “내가 가진 재능이 내 인생을 바꿀수 있다”라는 희망이 현실로 다가온 것 같았습니다. 이름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였습니다. 첫 시험에서 전교2등을 하였습니다. 학원 한번 다니지 않고 문제집으로만 공부를 한 나, 이대로만 하면 우리 가족에게 많은 돈도 벌어다 줄 수도 있겠다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아빠가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 심하게 다쳐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됐다는 소식을 언니에게 들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눈이 퉁퉁 붓고 목이 쉴 때까지 울었죠.. 그 순간 언니가 “내가 돈을 벌면 되니까 너는 어떻게든 공부를 끝까지 해줘, 개천에서 용 한번 제대로 나 봐야지”라고 말하더군요. 그렇게 말하는 언니에게, 저는 너무 미안해서 죽을듯이 공부를 했습니다.. 아빠와 언니가 나를 위해 희생해 준 것에 보답하듯, 전 서울 유명 대학 의대에 합격하였습니다. 아빠는 언니와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였습니다. “너희들이 사달라고 졸랐던 맛있는 음식 한번 못 먹인 이 못난 애비 밑에서 잘 커줘 너무 고맙고 미안하다..”며 엉엉 울었습니다. 유명 의대생이란 유명세에 전 깜짝 놀랐습니다. 세달 열심히 과외해서 밀린 월세도 갚고, 400만원이나 남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친 언니와 아빠에게 남은 돈 400만원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세식구는 너무 … Read more

“10원 한푼도 구걸하지않으마!!”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할머니 집으로간 저와 남동생, 사촌들은 우리를 고아원에 보내려했고 할머니는 한사코 막아냈습니다.. 이제 저는..

5살이였던 저와 3살이던 남동생을 놔두고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저희곁을 떠나셨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기신 빚을 갚는다고 서울로 가신 뒤 연락이 끊겨 버렸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시골 할머니 손에 맡겨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할머니 집에서 자란지 1년 되던 어느날, 큰아버지와 그 형제들이 찾아와 할머니와 언성을 높이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큰아버지는 우리에게 새 옷과 새 신발을 주시고선 “좋은곳으로 가게 됐다”라고 짤막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울먹이시던 할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큰아버지는 저희 남매 손을 이끌고 문밖을 나섰는대요. 친척들 누구 하나 따라 나오는 사람이 없었지만 할머니는 다르셨습니다. 버선발로 뛰쳐나와 저희 남매를 끌어안고 우셨습니다. “죽은 내 아들 불쌍해서 이것을 못 보낸다. 너희들헌티 10원 한푼 도와 달라고 안할테니까, 얘들 보내지마라. 그냥 내가 키우게 놔둬라 이 배은망덕한놈들아!” 할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목 놓아 우셨습니다. 그날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도, 제 남동생도 없었겠지요. 할머니의 눈물이 지금의 저희 남매를 있게 해 준 것입니다. 고아원에 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저희 남매는 할머니께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은혜를 입은것인데 그게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철이 들 무렵이 되어서야 그것을 알았습니다. 할머니는 큰아버지나 친척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10원 한 푼 받지 않고 저희 남매를 기르셨습니다. 배부르게 먹이지 못하는 할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새 옷 한벌 사주지 못하는 할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렸을지.. 남의 집으로 옷을 얻으려 다니며 할머니가 얼마나 고개를 숙이셨을지.. 그땐 미쳐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조금이라도 더 불쌍하게 보여서 뭐 하니 얻으려고 애쓰는 할머니의 모습이 싫고 창피할 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저희 남매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사신거였죠. 비록 가난해서 봄이면 나물을 뜯어다 장에 내 팔고, 여름이면 고기를 잡아다 어죽 집에 팔고, 가을 이면 도토리를 따다 묵 집에 팔고, 겨울에는 손에 마늘 독이 베이도록 마늘을 까서 돈을 벌어야 했지만 … Read more

“예의가 아닌건알지만 여쭤볼께요” 아들이 결혼하겠다고 데려온 예비며느리의 손을 보고 이상함에 물어보는데.. 잠시 뒤 들려온 얘기에 주저앉아 오열하고 말았습니다

20년전 길에서 잃어버린 딸을 찾은 사연이 공개됐는대요. 찾은 장소가 바로 아들의 결혼식이여서 더욱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중국 장쑤성 쑤저우에서 결혼식을 올리던 한쌍의 부부, 결혼식을 진행하던 도중 신랑어머니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예비며느리 손에 있는 반점을 보게되는대요. 순간 잘못봤나 치나치려했지만 그 반점은 20년전 잃어 버렸던 딸에게 있었던 반점과 너무 흡사 했기에 다시 한번 다가가 자세히 봤습니다. 잃어버린 딸의 반점과 같은 위치의 점, 신랑어머니는 예비며느리 얼굴을 다시 한번 천천히 뜯어보는대요. 이때 알지못했던 어렸을적 딸의 모습이 겹쳐보였다고 합니다. 보다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 실례인건 알지만 신부어머니께 다가가서 물었는대요. “정말 실례이지만 혹시 딸을 입양 하셨나요?” 그 질문을 들은 신부부모님은 크게 놀랐고 “사실 20여년전에 길에서 발견해서 저희가 키우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는대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신랑 어머니는 “과거에 자신이 잃어버렸던 딸이 있고 당신의 딸과 너무 비슷하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이야기를 이어가던 신랑 어머니는 자신이 딸을 잃어버린 시기와 사돈이 딸을 입양한 시기가 일치하는것을 알았는대요. 본능적으로 신랑 어머니는 예비 며느리가 본인의 딸임을 알고 다가가 모든 사실을 말했고 가만히 눈물을 흘리며 꼭 껴안아줬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겼는대요. 예비 며느리가 친딸이 맞다고 하면 자기 아들과는 친남매가 되는것이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놀라운 반전이 생겼습니다. 바로 신랑 어머니 또한 아들을 입양했기 때문인대요. 딸을 잃어버린 어머니는 큰 상심에 잠겼다가 몇년후에 잃어버린 딸대신 아들을 입양해 키워왔기 때문이죠. 그렇게 이 결혼식은 그대로 진행됐고 두사람은 원래대로 부부가 될수 있었습니다. 친딸은 “오늘 결혼식보다 친어머니를 찾은게 더 행복하다”며 눈물을 흘렸는대요. 이 이야기를 접한 네티즌들은 “영화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니..”, “엄마와 딸은 얼마나 서로를 그리워했을까 다시만나게되서 너무 감동이다”, “시잡살이는 없겠네” 등과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