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무 미안하구나..” 혈관성 치매로 급하게 병원에 입원한 할아버지를 홀로 1년동안 기다린 반려견, 다시 만난 주인과 반려견의 모습에 모두 오열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연은 유일한 가족이였던 반려견과 1년간 떨어져 지낼 수 밖에 없었떤 한 할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가슴아파 했는데요. 주인인 할아버지와 반려견인 차돌이는 서로를 아끼며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할아버지가 혼자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차돌이는 혼자 남겨지게 되었고, 이웃 주민들이 가끔씩 먹이를 주고 산책을 시켜주는 등의 도움을 받았지만 할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병원 검사 결과, 할아버지는 혈관성 치매로 인해 차돌이를 더 이상 돌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차돌이를 보지 못한지 어느덧 1년이 되갈 무렵, 할아버지는 차돌이를 사랑하며 그동안 함께 살았던 추억을 함께 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차돌이를 다른 좋은 입양자에게 맡기기로 결심하고 차돌이를 다시 볼 수 있도록 이웃 주민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며칠 뒤, 차돌이는 병원에 와서 할아버지와 다시 1년만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차돌이를 안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그동안 그리웠던 차돌이를 만나 “차돌아 보고 싶었다”며 큰소리로 울고말았는데요. 차돌이는 예나 지금이나 할아버지에게 안겨 반갑게 맞이해주었습니다. 잠깐의 마주함을 뒤로하고 이제 할아버지는 차돌이와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이웃 주민에게 “차돌이를 돌봐줘서 고맙다”며 차돌이에겐 “아프지 말고 건강히 지내”라고 말하는 할아버지의 말에 모두 눈물을 흘리고 말았는데요. 이러한 할아버지와 차돌이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너무 감사했네” 매일같이 일하던 편의점을 찾아오는 할아버지와의 마지막날, 잠시 뒤 저에게 건넨 ‘이것’에 눈물만 뚝뚝 흘렸습니다.

“그동안 내 얘기를 들어주느라 정말 고맙네” 한 온라인 커뮤니티 ‘편의점 갤러리’에는 ‘할아버지가 방금 5만원을 주셨어요’라는 제목으로 편의점 직원 A씨의 사연이 올라왔습니다. 사연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지팡이에 의지한 채 국산 담배를 구입하는 등 A씨 편의점을 자주 찾는 단골손님이었는데요. 할아버지가 방문할 때마다 A씨는 10분 정도 수다를 떨었고, 이날은 A씨가 그곳에서 일하는 마지막 날이라고 말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잠시 고민하다가 주머니에서 5만원권 지폐를 꺼내 A씨에게 건네며 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 데 대해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돈을 받지 않겠다는 A씨의 고집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계산서를 그녀 앞에 두고 걸어나갔는데요. A씨는 무거운 마음으로 할아버지가 떠나는 것을 지켜봤고, 그녀가 올린 사연은 많은 누리꾼들을 감동시켰는데 “할아버지의 마음이 여기까지 전달되는것같다”, “선행은 되돌아오는것”, “글쓰니 인성은 안봐도 알듯” 등의 댓글이 달렸습니다.

“처음엔 무슨뜻인지 몰랐어요..” 새로 취직한 회사에서 요구한 나와 부모님의 ‘이것’, 얼마 후 일어난 일에 부모님은 절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몇년전에 어떤 회사에서 신입 사원들이 입사하면 반드시 월급을 송금받을 계좌와 함께 부모님의 계좌도 함께 제출 하도록 해 매월 부모님께 10만원씩 월급외 용돈을 지급하는 회사가 있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비록 크지 않은 액수지만 자녀들의 회사로부터 매월 고정적으로 받는 용돈으로 부모님들은 너무나도 기뻐하고 심지어 용돈이 입금 될때마다 통장을 들고 나가 온 동네에까지 자랑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기업에 다니는 다른 자녀들을 하나도 부러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부모님을 배려하는 그런 결정을 실천하는 회사의 사장님도 참으로 대단하신 분입니다. 2015. 4월 제 14차 한상대회때 대회장으로 우리나라를 찾은 송창근 회장은 울산대학을 졸업하고 나이키 회사에 공채로 지원하여 신발업계와 인연이 맺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신발 만드는 기술로 인력이 풍부한 인도네시아로 건너가 단돈 300불로 식당자리를 빌려 무역업을 시작했습니다. 회사는 점차 성장하여 종업원이 무려 4000명이나 되는 신발 제조업의 그룹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잘나가던 회사는 98년 IMF를 만나 모든것이 순식간에 곤두박질 쳤습니다. 나라안에는 폭동이 일어나고 이로인해 많은 외국회사들이 인도네시아를 떠나갔습니다.   그동안 주 거래처였던 나이키에서도 발주가 뚝 끊겨 회사는 절대 절명의 위기에 빠졌습니다. 은행에서는 빌린 돈 200만불을 갚으라고 연일 독촉장이 왔고 전혀 돌아가지 않은 공장에서 4000명이나 되는 종업원들은 허탈해 하며 곳곳에서 훌쩍거리며 울고 있었습니다. 마음에 굳은 결심을 한 송회장은 비상한 각오로 미국 나이키 본사에 가기위해 공항으로 향하기전 전 직원들을 모아놓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나이키 본사에 가서 좋은 결과가 있도록 하나님께 가족들과 함께 기도해 달라”며 애절하게 간청했습니다. 공장에서 슬피 울고있는 종업원들의 모습을 가슴깊이 담고 송회장은 미국 나이키 본사로 가서 우리 직원들을 위해 일거리를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나이키의 성장을 위해, 그리고 주문을 위해, 직원들과 그의 가족들이 울며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종업원과 그의 가족이 우리회사의 자산이라고 말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나이키는 이 회사에 다시 주문을 내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전 세계 나이키의 총 생산량 1/4을 차지 하고 있고 종업원도 2만여명이나 되며 연매출 2억5천만불이나 하는 인도네시아 … Read more

“이젠 정말 몰라보겠네..” 안타깝게 불치병에 걸린 故 최진실 딸 최준희양의 몰라보게 변한 근황과 쏟아지는 비난들

2023년 3월 15일 방송된 ‘생로병사의 비밀’에서는 전신을 공격하는 천의 얼굴을 가진 병 루푸스와 치열하게 싸우는 청춘들의 이야기 류마티스 질환과 싸우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공개했는데요. 故 최진실의 딸 최준희 양은 16살에 루푸스를 진단받은 루푸스 환우입니다. 그녀는 투병 중인 모습을 종종 공개한 바 있습니다. 지난 2019년에는 “왜 요즘 셀카 다 내렸냐고 묻는 말이 많더라고요. 사실 두달 동안 몸이 너무 안 좋았어요. 질병에 걸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죠. 루푸스라는 자가면역질환에 걸려 두 달간 병원에 입원해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라고 털어놨습니다. 이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병이지만 막상 걸리면 사람이 미쳐 돌아버려요. 조금 나아져서 어제 퇴원했는데 몸이 완전 퉁퉁 부어서 걸어 다닐 수 없었어요. 당시 다리에 물이 차서 휠체어 신세를 졌어요.”라고 밝혔는데요. 16살 진단 당시 치료를 위해 복용한 스테로이드 약물의 부작용으로 체중이 증가하며 극심한 관절통과 부종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했었지만 현재는 꾸준한 자기 관리로 44kg을 감량하고 다시 건강을 되찾아 화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다시 루푸스가 찾아와 다시 병원을 찾고 있다고 하는데요. 그녀를 이토록 괴롭히는 루푸스는 도대체 어떤 병일까요. 병명조차 생소한 루푸스는 주로 가임기 젊은 여성들에게 발병하는 희귀 난치성 질환으로 자가면역 류마티스 질환 중에서도 다양한 증상이 전신에 나타나 ‘천의 얼굴을 가진 병’이라 불립니다. 인체를 … Read more

“장애인의 아들이라는게 두려웠다” 국가유공자의 아들로 찢어지게 가난한 삶속에서 좋은 의사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국종 교수의 진짜 이유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 아버지가 6.25 직후 북한과의 교전상황에서 한쪽 눈을 잃고 팔다리를 다친 장애 2급 국가유공자였습니다. 친구들이 ‘병신의 아들’ 이라 놀리는게 두려워서 중학교때까지 아무에게도 국가 유공자의 가족이란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집안은 늘 가난했습니다. 가끔 술을 마신 아버지는 제게 “미안하다” 는 말만 반복하셨습니다. 중학교때 축농증을 심하게 앓은적이 있습니다. 치료를 받으려고 병원에 찾았는데 국가 유공자 의료복지카드를 내밀자 간호사들의 반응이 싸늘했습니다. 다른 병원에 가보라는 말을 들었고 몇몇 병원을 돌았지만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이 사회가 장애인과 그 가족들에게 얼마나 냉랭하고 비정한 곳인지 잘 알게됐던 것 같습니다. 그럴때마다 ‘내가 어른이 되면 아픈 사람에겐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병원을 전전하던 중 외과의사 이학산 선생님께서 제가 내민 카드를 보고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진료비도 받지 않고 정성껏 저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저를 비롯해 형편이 어려운분들께 거의 돈을 받지 않고 치료를 해주셨던것 같습니다. 굉장히 어린 나이였지만 마음 속 깊이 감사함을 느꼈고, 그분들과 같은 좋은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꿨습니다. 뱃사람의 정신으로 걸어온 의사의 길 의대 4년을 마치고나니 집안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더 이상 의사의 길을 갈 수 없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에 제적 신청을 하고 2주 뒤 해군 갑판병으로 입대했습니다. 상사와 전우들은 제가 의사의 길을 계속 걸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좋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분들이 강조하신게 바로 뱃사람의 정신이었습니다. “뱃사람은 어떤 큰 파도도 헤쳐 나가며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고, “소금기와 기름때에 찌든 군복은 값진것”이라며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해도 학업을 계속 이어가길 권유하셨습니다. 아마 해군에 입대하지 않았다면 의사가 아니라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국종 교수가 진짜 의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힘들때 들은 주변의 ‘따뜻한 말 한마디’ 였습니다.

“사람들이 무서워 집밖을 못나왔어요..” 생후 100일에 친모에게 버림받고 30대 미혼모가 되어 극단적인 생각까지 할 수 밖에 없었던 개그계의 대모의 안타까운 속사정

이성미는 재치 있는 입담으로 개그계의 대모라고 부를 수 있는데요. 그녀는 가수 김학래와 미혼으로 아이를 낳아 당시 미혼모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방송계에서 퇴출까지 당하며 극단적인 선택까지 할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죠. 이 일로 김학래는 무책임한 입장을 내놓아 많은 비난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방송계의 군기반장으로 알려져 있는 이성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성미는 1959년생으로 올해 나이 65세이며 서울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를 졸업한 후 1978년 연극배우로 첫 데뷔하였습니다. 이듬해 1979년에는 뮤지컬 배우로 데뷔하였으며 1980년 tbc ‘개그 콘테스트’를 통해 연예계에 정식 데뷔하였죠. 이후 ‘유머1번지’ 등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어린시절 외동딸로 귀하게 컸다고 하는데요. 2019년 kbs1 ‘아침마당’에 출연해 “초등학교 지나서 저를 낳아주신 어머니가 100일 전에 저를 낳고 떠나셨는데 그걸 모르고 지냈어요. 두 … Read more

“과연 이게 맞는걸까..” 40대 중반 가정주부로 방송대학교에 입학한 소식을 엄마에게 전하자 한걸음에 달려오셨고 잠시 뒤 일어난 상황에 목이 메여 아무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15년 전 부모님 몰래 치른 대학 시험에 덜컥 합격했다. 대학 합격 통지서가 나오던 날 어머니는 처음으로 자식들 앞에서 눈믈을 흘리셨다. 수박 농사 흉작으로 농협에 진 빚도 못갚고 정성스레 가꾼 무와 배추의 가격이 폭락해서 모두를 낙담할 때도 담담하셨던 어머니셨는데.. 집안 형편을 뻔히 알면서도 대학에 가겠다고 졸랐었다. 하지만 어쩔수 없이 배움에 대한 갈증을 억누르고 작은 사무실에서 7년동안 근무했다. 알들하게 돈을 모아서 동생들 학비도 대고 결혼도 했다. 이젠 아이까지 낳고 아줌마 냄새가 나는 주부가 되어 예전에 못했던 공부에 미련이 남아 방송대학교에 입학을 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어머니는 바쁜 농사일도 뒤로 하고 한달음에 달려오셨다. “잘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데이. 내가 너 대학 못 보낸 게 한이 되었는데 이젠 죽어도 원이 없다..” 어머니는 얼마 안 된다며 등록금에 보태라고 돈을 주셨다. 나중에 그 돈이 어머니가 환갑 때 반지를 판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목이 메었는지 모른다. 내가 또 괜한 일을 한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 날 밤 어머니는 내가 결혼하고 처음으로 딸네 집에서 주무셨다. 결혼한지 6년이 지나도록 딸네 집에서 주무시기는커녕 따뜻한 밥 한공기 대접에도 미안해하시던 어머니가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 편하게 주무셨다. 그제야 어머니의 마음을 알수 있었다.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것만도 고마운데 대학을 못 보내준 것이 그토록 마음에 남으셨나 보다. 남편과 아이가 잠든 머리맡에서 전공 서적을 펼처 놓고 한줄 한줄 읽으며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해본다. ‘엄마, 학사모를 쓴 모습 꼭 보여드릴게요. 그리고 딸네 집에 자주 오셔서 저희 사는 모습을 지켜봐 주세요. 사랑해요.’

“엄마, 저 다녀올께요” 방학을 맞아 친구네 놀러간다는 아들은 그 뒤로 다시 만날 수 없었고 이후 아들의 ‘마지막 편지’를 발견한 전 그대로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고말았습니다

[엄마의 일기] 눈물을 흘리며 어두운 밤 눈가에 흘리는 눈물을 누군가 볼까봐 연신 주의를 살폈다. 내일은 내 사랑하는 아들 현이가 소풍을 가는 날이다. 주인집 아줌마에게 사정을 해서 만원을 빌렸다. 김밥 재료를 사고 3000원이 남았다. 아들은 내일도 웃으면서 돈을 받지 않을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벌써 애는 일어나 나를 멀그러니 바라보고 있었다. 김밥을 싸고 있는데 자꾸 눈물이 나온다. 혹시나 볼까 봐 뒤로 앉았더니, 애는 뭘 아는지 밖으로 나간다. 벌써 다 큰 걸까? 남들처럼 잘 먹였으면 키도 많이 컸을텐데 올 겨울이 걱정이다. 주인집에선 나가길 원하는 눈치인데 내일은 파출부 자리나 알아봐야겠다. [아들의 일기] 엄만 오늘도 우셨다. 내일은 말해야 할텐데 학교 등록금을 안냈다고. 벌써 3개월이 지났는데 이제 반년만 지나면 졸업인데 자꾸 가슴 아픈게 심해진다. 양호실에 또 가서 진통제를 받아야 하나. 엄만 많이 힘들어 하시는 것 같은데 신문배달도 요즘 들어서 하기가 힘들어진다. 뛸 수가 없으니. [엄마의 일기] 오늘도 아이는 도시락을 조금 남겼다. 매일 김치만 싸주니 오늘 저녁은 또 뭘 먹이나? [아들의 일기] 어제 저녁에도 엄마에게 등록금 얘길 못했다. 간장에 밥 비며 먹는 내 모습에 어머니가 서럽게 울었다. 내일은 선생님한테 얘기하고 자퇴를 내야겠다. 돈을 벌어 어머니를 내가 모시는게 나을것 같다. 아버지 제사날이 내일인데 어머니는 알고 계실까? [엄마의 일기] 아이가 잠을 못자는 것 같다.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아들의 일기] 엄마에게 미안하지만 학교를 그만 두었다. 내일은 신문보급소에 가서 얘기하고 병원에 한번 가 봐야겠다. 어제밤에 한숨도 못 잤다. 몹시 아팠지만, 어머니가 걱정하실까 봐 물도 못 마셨는데 밥을 너무 못 먹어서 그런가 간장만 먹으면 설사를 하니. 1200만원에 내 장기를 사 준다니 엄마에게는 그냥 주었다고 말해야겠다. 좀더 살고 싶지만, 엄만 너무 힘들어 하신다. 내일은 아버지 산소에나 가봐야겠다. [엄마의 일기] 아들에게 고기를 사 주려고 머리를 잘랐다. 보자기를 쓰고 있는데, 아들이 그냥 울고만 있다. 고기는 먹지도 않고. [아들의 일기] 오늘 돈을 받았다. 엄만 길거리에 주었다고 하면 반드시 돌려 드리라고 하실건데, 당분간 내가 갖고 있어야겠다. 방학을 맞아 친구네 놀러 간다고 하니 엄만 믿으신 것 같다. 편지를 쓰는데 자꾸 눈물이 난다. [엄마의 일기] 아들이 방학을 맞아 친구네 집에 놀러 간단다. 난 흔쾌히 허락했다. 아무래도 여기 있는것 보단 잘 먹을 수 있겠지. 그런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들을 다시는 못볼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괜한 걱정이겠지. [아들의 마지막 편지] 어머니께. 정말 사랑해요. 슬퍼하지 마시고, 진지 꼭 챙겨 드세요. 그냥 저 멀리 여행 갔다고 생각하시고, 그냥 엄마에게 효도 많이 했으니까 아버지에게도 해야죠. 아버지도 반가워 하실꺼예요. 눈물은 제가 오늘 다 흘릴테니까요 어머니 이젠 눈물 흘리지 마세요. 저 백혈병이래요. 수술해도 안된데요. 어머니, 저 잊지 마시고요. 다음 세상에도 제 어머니 되어 주세요. 사랑해요. 돈은 제가 선한일 해서 번거니까 마음껏 쓰시고요, 먼저 가서 죄송해요. 울지 마시고요, 꼭 오래 사시고 오세요. 아들 현이가.

“가슴에 안고 여러번 울었네요..” 학교 숙제로 부모님이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을 그려오라시켰고 한 아이가 그려 온 그림에 저는 아이를 꼭 안아주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숙제를 내 주었습니다. “부모님께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물건을 그려 오는 거다. 엄마나 아빠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물건을 한 가지만 예쁘게 잘 그려 오는 거야. 알았지?” 선생님의 말씀에 아이들은 저마다 많은 생각에 잠깁니다. 엄마나 아빠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신 것이 무엇일까? 학생들 각자는 머리 속에 그 물건이 무엇인가를 상상하며 그려 봅니다. 다음 날, 발표시간이 되었습니다. 첫째 아이가 나와서 자신이 그린 그림을 친구들에게 보여 주면서 설명을 합니다. “이건 우리 아빠가 부는 나팔인데요, 우리 아빠가 이것을 불면 엄마는 노래를 하세요. 두 분이 다 아주 소중하게 여기시는 악기입니다. 노란 금으로 도금이 되어 비싼 악기라고 하셨어요.” 또 다른 아이가 나왔습니다. “저희 할아버지가 다른 사람에게는 손도 못 대게 하는 아주 비싼 도자기예요. 우리 집안의 가보라고 하세요. 우리 고조의 고조 할아버지 때부터 오래오래 보관해 온 도자기라예요. 값이 얼마인지도 모르는 아주 비싸고 귀중한 도자기라고 하셨어요.” 이렇게 여러 아이들의 그림을 보면, 카메라를 그려온 아이, 승용차를 그려온 아이, 엄마의 보석반지를 그려온 아이, 아이들의 그림 속에는 정말 비싸고 귀해 보이는 물건들이 가득히 있었습니다. 선생님도 그 아이들의 가보 자랑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발표를 한 영준이가 자신의 도화지를 펼쳐 보이자 아이들이 깔깔대며 손가락질을 하였습니다. 영준이가 들고 있는 도화지에는 쭈글쭈글한 베개 하나가 덜렁 그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준이는 친구들의 웃음 소리에 아랑곳 하지 않고 발표를 계속하였습니다. “이건 우리 엄마가 베고 주무시던 베개인데요. 그런데 우리 엄마는 작년에 돌아 가셔서 이 세상에는 안 계세요. 엄마는 더 이상 이 베개를 벨 수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 아빠는 이 베개만은 절대로 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이 베개를 엄마가 살아 계셨을 때와 똑같이 침상에 나란히 놓고 주무시는데 우리 아빠에게는 이 베개가 가장 소중한 물건이예요. 우리 아빠의 침상에 가서 엄마의 베개를 보면 엄마 생각이 나요. 엄마의 베개를 가슴에 안고 여러 번 울기도 했어요. 엄마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너무 너무.. 우리 엄마가..” 영준이는 목이 메어 더 이상 설명을 못하였습니다. 떠들썩 하던 교실의 분위기가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영준이 짝꿍은 영준이의 엄마를 생각하며 훌쩍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옆에 있던 아이가 또 눈물을 닦고 있었습니다. 순간적으로 교실 안이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엄마가 없는 영준이, 그리고 엄마가 베던 베개를 침대 위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주무시는 영준이 아빠의 외로운 모습이 눈 앞에 그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생님도 콧날이 시큼해 지셨지만 억지로 눈물을 참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살며시 영준이의 옆으로 다가 가서 떨리는 영준이의 어깨를 꼬옥 감싸 안아 주셨습니다. 엄마가 살아 계셨을 때에 자식을 껴안아 주듯이… 그리고 여러 학생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정말로 이 베개는 무엇보다도 가장 값지고 소중한 물건이로구나..”

’14건의 절도 및 폭행 등’ 친구들과 오토바이를 훔쳐 도망가다 잡힌 16세 소녀, 정적이 흐르는 법정에서 시작된 판사의 ‘이 한마디’에 그 누구 할것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서울 서초동 소년법정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서울 도심에서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를 훔쳐 달아난 혐의로 구속된 한 소녀, 방청석에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용한 법정 안에 중년의 한 여성부장판사가 들어와 무거운 보호 처분을 예상하고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던 소녀를 향하여 조용히 다정한 목소리로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따라 힘차게 외쳐 보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다.” 라고. 예상치 못한 재판장의 요구에 잠시 머뭇거리던 소녀는 나지막하게 “나는 이 세상에서..” 라며 입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더 큰소리로 나를 따라 하라고 하면서 “나는 이 세상이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큰 목소리로 따라하던 소녀는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라고 외칠 때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소녀는 작년 가을부터 14건의 절도, 폭행 등 범죄를 저질러 소년 법정에 섰던 전력이 있었고 이번에도 동일한 수법으로 무거운 형벌을 받게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판사는 소녀를 법정에서 일어서게 하고 따라서 외치는 것으로 판결을 대신했기 때문에 법정안의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판사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이 소녀가 작년 초까지 어려운 가정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반에서 상위권성적을 유지하였으며 훗날에 간호사를 꿈꾸던 발랄한 학생이었는데 작년 초 귀가 길에서 남학생 여러 명에게 끌려가 집단 성폭행을 당하면서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소녀는 당시 후유증으로 병원의 치료를 받았고 그 충격으로 홀어머니는 신체 일부가 마비되기까지 하였으며 그 이후 학교를 겉돌았고 심지어 비행 청소년들과 어울려 다니며 자신이 당했던 유사한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판사는 다시 법정에서 지켜보던 참관인들 앞에서 말을 이었습니다. “이 소녀는 가해자로 이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삶이 망가진 것을 알면 누가 가해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의 잘못에 책임이 있다면 여기에 앉아있는 여러분과 저 자신, 사회를 이렇게까지 방치한 어른들 모두입니다.” “이 아이가 다시 이 세상에서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잃어버린 자존감을 다시 찾아주는 판결 뿐입니다.” … Read more